#3 지금은 청년팔이 시대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한편》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2020년, 창간호 주제인 ‘세대’에 관해 젊은 편집자가 청탁하고 젊은 연구자가 원고를 썼는데요. 지난 몇 년간 세대론을 비판해 온 ‘청년’ 문화연구자는 첫 번째 저서인 『청년팔이 사회』를 출간한 뒤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변화하는 것을 느낍니다. 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나의 첫 책인 『청년팔이 사회』의 제목은 담당 편집자가 제안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회’로 끝나는 인문사회 서적에 소속되기가 좀 망설여졌고, 무엇보다 ‘청년팔이’가 학문적으로 명료하게 정의된 개념이 아니어서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차츰 이 제목이 책에서 다루는 생소한 핵심개념인 세대주의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대주의(generationalism)란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세대의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 현상”(「세대를 생각하기(Thinking Generations)」(2013))을 일컫는다. 세대의 분류법은 무한히 다양하지만, 대다수의 세대주의적 세대론은 흥미롭게도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전통적인 이분법으로 되돌아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때 세대주의는 ‘청년팔이’라는 단어와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만난다.
 

수많은 ‘청년팔이’ 사례를 들 수 있다. 박근혜 정부와 보수 계열 시민사회 단체들은 임금피크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이 기득권 기성세대의 몫을 ‘청년에게 나누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헬조선, 학벌주의, 공정성 등의 이슈는 언론을 비롯한 매개자들에 의해 마치 청년층에게서만 유난하게 나타나는 현상인 양 해석됐다. 
 
청년들도 ‘청년’을 판다. 청년정책의 폭넓은 도입, ‘청년을 위한 정치’, ‘청년에 의한 정치’ 등을 주장하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물론, 이러한 현상을 분석한답시고 매번 A4 한 장에 ‘청년’이라는 단어를 20~30번은 입력하는 나 같은 연구자의 행위도 근본적으로는 청년팔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세대주의와 청년팔이의 핵심은 다른 개념을 제쳐 두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노동의 언어로, 공정성 이슈를 분배의 언어로, 청년의 목소리를 의제별 언어로만 다루지 않고 ‘청년’을 꼭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형성된 세대‘주의’에서 우리 누구도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세대주의는 교묘하게 계산된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일상적으로 편재해 있는, 대다수 사회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상에 가깝다. 
 

  

‘청년팔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상황에 대해, 이전의 나는 세대주의를 근본적으로 배격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세대주의적 담론이 갖는 몇 가지 일반적인 경향들 때문이었다. 세대주의는 많은 경우 세대 내의 이질성을 간과함으로써 세대 내 선택과 배제를 구조화하고, 이에 따라 다층적인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게다가 세대주의적인 ‘청년’론이 누적된 결과 청년이라는 정체성은 피해자, 약자화되고 시혜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세대주의 바깥에서 그것의 허구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위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세대주의를 비판해도, 그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세대주의 담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세대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 심지어 나조차도 근본적으로 세대주의라는 문화적 상상의 영향권 밖에 위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새롭게 다짐했다. 세대주의와 청년팔이에 대한 비판을 계속하면서, 나 자신도 이 세대주의와 청년팔이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청년팔이의 시대’ 밖으로 도피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유약한 마음과 단절하고 기꺼이 이 전쟁에 참여하여 어떻게 더 윤리적으로 ‘청년’과 세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윤리적인 ‘청년팔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 또한 끊임없이 조정되겠지만, 잠정적인 두 가지 원칙은 이렇다. 우선, 대안적인 ‘청년팔이’는 다차원적인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만 19~39세의 청년층 인구는 천만 명이 넘기 때문에, ‘청년’을 주어로 전체를 이야기하게 되면 같은 청년이라도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배제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청년’에 대한 강조가 세대 내의 불평등과 격차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으므로, ‘청년’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문제에 각별히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여기에 덧붙여, 대안적인 ‘청년팔이’는 랑시에르적인 의미에서 청년을 해방(émanc-ipation)에 이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2008, 2016)에서 피에르 부르디외를 겨냥하면서 사회학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과학적 선을 위해서”(193쪽) 계급 간의 가상적인 경계를 교란하기보다는 그것을 공고화하는 담론을 생산한다고 비판한다. 한편 랑시에르에게 해방이란 경계를 교란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해방은 개인이 소속된다고 전제되는 각 계급의 ‘제자리’와, 그에 따라 정해진 에토스에서 벗어나 개인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청년팔이 사회』의 주요 독자는 자신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청년팔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보는 젊은 정치인들이나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청년이라는 이름을 자임하면서, 혹은 청년을 호명하는 제도에 자발적으로 호응하면서 각자가 바라는 세계를 열어 내기 위해서 일상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내 책의 문제의식을 접하고서, ‘청년 정치나 청년 운동과 같은 개념을 폐기해야 하느냐’라고 진지하게 질문하는 실천가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답변은 이런 것이다. 청년을 이야기하거나 팔지 말라고 기성세대에게 소리치는 전략에는 한계가 크다. ‘청년팔이’를 해 온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해하도록, 우리의 청년 담론에 동의하지 않는 그들에게까지 강제될 수 있도록, 우리는 오히려 청년을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 김선기, 「청년팔이의 시대」 중에서
《한편》 제1호(2020년 1월호), 35~52쪽
2019년 여름, 청년팔이 사회 북콘서트로 전국 방방곡곡을 방문한 김선기는 ‘청년 희망사다리’ 표어를 든 공무원들 앞에 청년 대표로 서는 자신의 모습을, 또한 그의 책을 읽고 고민하는 청년정치 활동가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전까지 청년팔이 개념을 비판해 왔다면, 이러한 경험을 계기로 더 나은 청년의 대표 방식을 찾게 된 것이죠. 이 글 「청년팔이의 시대」는 김선기와 대학 시절 《고함20》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한 이한솔 편집자가 편집했습니다. 

김선기는 『청년팔이 사회』의 저자로, 현재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으로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인터넷 언론 《고함20》을 시작으로 청년/세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최근에는 젊은 연구자들이 학계의 견고한 관성을 깨뜨릴 방안이 없을지 여러 가지를 실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