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철학과 아방가르드 문학의 만남 : 베케트, 바디우, 들뢰즈
절망의 작가 베케트에게서 현대 철학이 찾아낸 희망과 사랑의 흔적
『베케트에 대하여』, 『소진된 인간』 출간 기념 연속 강연회
제1강, 서동욱 교수님과 함께한 ‘현대 철학의 중심에서 만나는 베케트’ 강연 후기!
얼마 전 민음사와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베케트’에 대한 두 권이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습니다.
알랭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와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이 그것이지요.
서로 다른 지점에서 ‘베케트론’을 다루고 있는 이 두 철학자들의 이야기란 과연 어떤 것일까,
텍스트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긴밀히 나누기 위해, 민음사와 문학과 지성사가 공동으로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강연에 앞서, 민음사 대표 편집인이신 장은수 대표님께서 이러한 두 철학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양사가 함께 공동 강연을 기획, 진행하게 되었다는 배경과 취지를 말씀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 동안은 이러한 인문철학에 집중된 강연을 많이 마련하지 못했지만
이번 계기를 통해, 그리고 이 다음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앙티 오이디푸스』 발간을 기념하며,
또 한 번 다양한 강연을 마련해 볼 계획이라며 설레는 말씀도 전해주셨지요.
성원 속에 빠르게 마감되었던 『베케트에 대하여』 출간 기념 연속 강연,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바로 어제, 서동욱 교수님과 함께
‘현대 철학의 중심에서 만나는 베케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총 3회에 걸쳐 진행되는 연속 강연의 첫 강연자로,
강연의 전체 얼개와 흐름을 살피는 강연을 맡아주신 서동욱 교수님의 모습입니다.
먼저 교수님께서는 베케트의 작품을 일반적으로 읽기란 매우 어렵다며,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제외하면 아주 마니아틱한 작품에 해당된다고 하셨는데요
베케트는 흔히 ‘들뢰즈, 사르트르, 바디우’ 즉 ‘실존주의’라는 카테고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하지만
본 강연에서는 들뢰즈와 바디우, 두 저자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동시에 출간된
그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현대 사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본 강연의 논점 중 하나이며,
베케트를 통해 두 학자의 논의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이를 한꺼번에 다뤄보려 하신다고요.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열정적인었던 강연 후기를 간단하게나마(?) 전해드립니다.
들뢰즈와 바디우는 과연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두 철학자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좌파 철학을 대표하지만,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인물들이었다.
1. 베케트와 실존주의
베케트와 카뮈, 베케트와 사르트르, 베케트와 메를로 퐁티 등을 검색을 해보면,
논문부터 학생 리포트까지 엄청난 숫자의 텍스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만 봐도, 베케트에 접근하는 정형화된 접근 방식 중 하나가 ‘실존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이라고 하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그가 보이지 않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인간적인 상황을 실존적 상황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베케트 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실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고,
베케트가 실존주의와 관련해 스스로 어떻게 이야기 했는가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1) 베케트는 ‘가브리엘도바르데’와의 인터뷰에서 실존주의와 자신의 직접적 관련성을 부정했다.
2) 사르트르는 베케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매우 좋아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난 30년간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최고의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모든 주제는 부르주아적이다. 고독, 절망, 시답지 않음, 소통 불능 등.
이 모든 주제는 부르주아적 내적 고독의 소산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15년 정도 일찍 나와,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라는 실존주의의 피크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전제 이 작품을 접했다면 사르트르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사르트르가 이런 언급을 하던 시기적 배경에는, 1960년에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쓴 무렵과 맞물려 있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 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데,
베케트의 극에 담긴 것이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다.
즉, 실존적으로 읽힐 수 있고, 실존주의를 통해 그 텍스트를 이해하고자 함과 동시에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듯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형성되어 온 것이 베케트의 이야기이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형성된 문학이라는 것은 오늘날 찾아볼 수 없는 기복을 지닌 전위적 운동이다.
1920년대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 등이 등장한 이후, 50년대에는 앙티 로망으로 불리고
누보 로망으로 고착된 실험적인 작가들이 출현한다. 연극에서도 반연극, 부조리극으로 불리는 작품을 하던
베케트, 이오네스크 등이 활동하던 시기다. 반소설, 누보 로망, 반연극, 부조리 연극 등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현대의 문학 예술 가운데 가장 전위적인 실험이 활발하고 최고의 수준으로 올라갔던 시기였다.
여기서 ‘활발했다’는 것은 작가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들과 비평가들도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이다.
베케트는, 분류가 가능한 모든 장르에 속하면서도 모든 전위적인 장르 분류
어디에도 맞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성향을 지닌 작가다.
베케트에 대한 실존주의적인 해석은 비평적인 면에서 굉장히 쉽기도 하다.
고도가 누구냐? 신이다. 인간은 신을 기다리지만 대답도 들을 수 없고…… 등등
고도 안에 익숙한 실존주의적 물음을 대입하면 그럴 듯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베케트에 접근할 것인가?
이제부터는 이러한 실존주의적 텍스트에서 벗어나 베케트의 텍스트를 읽어보도록 하자.
알랭 바디우의 『베케트에 대하여』는 학술적인 느낌도 있지만, 바디우 개인의 독서 체험,
즉 지금까지 읽어온 베케트 독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를 실존주의와 구별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베케트에게서 발견했던 것들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부조리와, 절망과, 빈 하늘과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영원한 고독의 작가, 한 마디로 실존주의자.
하지만 글쓰기의 운명, 되풀이되는 말과 원초적 침묵 사이의 관계, 말들이 지닌 숭고하면서도
동시에 덧없는 기능, 이 모든 것들이 어떠한 사실적 또는 재현적 의도로부터 멀리 벗어난 채
산문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알랭 바디우
소통 불능, 절망과 대별시켜서 바디우가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말의 덧없음, 무의미함, 무용성이다.
베케트에 대한 하나의 화두는 침묵이라 할 것이다. 『몰로이』 같은 작품에서 베케트가 무엇을 시도했는가.
말로 꽉 채우되 침묵의 상태로 빠져버리게 하는 것, 즉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말을 ‘한 줌의 재’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을 의도한다.
2. 들뢰즈와 바디우
실존주의 이후의 베케트에 대한 접근으로 들어가보자.
들뢰즈와 바디우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베케트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었다.
바디우의 저서 『베케트에 대하여』는 유용하게도 바디우가 논의하는 베케트에 대한 텍스트 선독이 있다.
발췌문을 모아 놓은 이 부분을 읽으면 베케트의 산문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체험이 가능할 것이다.
“베케트는 의심의 여지없이 코미디 연극의 큰 전통 속에서
존재를 말하는 금세기에 유일한 대작가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대조적인 2인조, 흐트러진 의상, 줄거리의 전개보다는 연속되는 놀이들, 저속함,
욕설과 배설, 고상한 언어, 특히 철학적 언어에 대한 패러디, 그럴듯해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한 무관심,
무엇보다 그들의 존재를 지속하고, 욕망의 원칙을 바람과 파도에 맞서 지키고,
모든 정황들이 매 순간 부질없고 불가능하게 몰아가는 가운데서도 삶의 힘을 유지하려는 인물들의 집착.”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중에서
위의 인용문에서 바디우가 말한 요소들이, 현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공통적인 속성, 면모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바디우는 어떻게 다른가.
일단 둘은 열두 살 연배 차이를 가지고 있고, 같은 대학을 나왔지만 방해조를 투입한다든가,
‘지적인 자살’이라 명명하는 격렬한 비난문을 게재한다든가 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많았다.
프랑스 좌파 철학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였음에도 극렬한 대립이 있었는데,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방식에 있어 정치적인 입장 차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일종의 협업 관계에 들어가는 상황이 오는데
1977년~1978년 사이 프랑스에서 유행한 신 철학의 등장이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대표적인 신 철학자인데, 이들은 매스미디어를 장악하여 목소리를 내고자 했으며,
정치운동으로서 평가되어야 할 사안을 통상적인 윤리라는 척도로 비판하는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즉, 철학의 사상계가 이런 지경에 놓였을 때
진정한 좌파, 진정한 철학자로서의 연대를
암묵적으로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 바디우와 들뢰즈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들뢰즈와 바디우의 베케트론의 공통점은, ‘침묵의 작가’로서의 베케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작품의 구조를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 아닌, 텍스트를 파편적으로 떼다가 다룬다.
『베케트에 대하여』와 『소진된 인간』 두 책 모두, 시 구절 다루듯 그의 텍스트를 대한다.
언어를 진흙처럼 던져놓은 것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뤄지는 작품들은 굉장히 파편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는 두 철학자의 스타일일 수도 있고, 베케트 텍스트의 원초적 속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들뢰즈와 바디우의 베케트론은 서로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 명시된다.
3. 들뢰즈의 베케트론: 소진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말의 의미를 떠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과정이다.
이 작품은 들뢰즈의 말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의 말년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노년’이었다.
들뢰즈는 나이가 들어서 내가 평생 해왔던 것은 무엇인가, 노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다.
『소진된 인간』에서는 그 의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이 소진된 시기에 해당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뢰즈가 말하는 ‘소진’이란 무엇일까.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더 이상 가능한 것은 없다.” ―들뢰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과 피로한 인간을 구분한다.
피로한 인간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지만 가능성을 실현할 힘은 없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가능성 자체가 없는 거다. 더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즉,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은 언어를 빈궁하고 앙상하게 만들고,
그 서사나 의미를 제거시키는 베케트의 작업 속에서 ‘소진’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모든 가능성을 버리도록 하는 소진. 소진은 결국 그 목적이다.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無)를 향한 것이다.
원초적 침묵, 덧 없는 기능, 의미 없음의 베케트의 글쓰기로부터 목격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소진이고, 그것이 어떻게 무에 도달하고자 하는지를, 들뢰즈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4. 바디우의 베케트론
『베케트에 대하여』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바디우가
그의 철학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만든 사물들은, 원초적인 국면과는 상관이 없다.
원초적 국면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가 바로 예술의 언어다. 예술의 예외성은 이런 국면에 도달한다.
근본적인 세상의 평균적인 비전 속에서 사물들의 모습과는 다른 근본적 국면이 드러난 다음에는
어렴풋한 존재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계속해 점점더 진리를 탐구해나가는 과정들이 출연한다.
바디우는 베케트 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들도 같은 관점에서 독해하고 있다.
현금의 질서에서 예외적으로 출연한 것이 문학이고, 이러한 경우에는 그 문학이 진리를 향한 도전에 서게 된다고 한다.
“나는 시인들의 시대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나는 시인들의 닫혀진 목록들을 내놓는다.
나는 일곱명의 결정적 시인들을 확인한다. 이들이 최고의 시인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의 시대를, 즉 시인들의 시대를 그었기 때문이다.
횔덜린, 말라르메, 랭보, 트라클, 페소아, 만델스탐. ” (바디우의 시인론)
바디우는 그의 시인론을 통해
문학을 통해 예외적인 사건이 세상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진리를 공표하게 하는 역할은 이 시대로 끝났다고 공표하고 있다.
한 편으로는 시인들의 진리에 대해, 또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문학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베케트론이 흥미를 끈다.
바디우는 베케트를 통해 문학이 세계로 다시 진입해 들어온 그 관점을 다시 목격하는 체험을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도 있다.
그리고 예술의 임무는, 모든 진리가 기원하는 이 예외적인 지점들을,
우리의 인내가 재구성해 낸 조직물 안에 간직하고 붙들어둬서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혹독한 작업이다. 거기엔 단어들 안에 흩어진 일종의 빛과 같은,
우리가 산문 속의 잠재적 시라고 불렀던 은밀한 조명과도 같은, 아름다움의 요소가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중에서
즉, 바디우는
완결된 시인들의 목록을 공개하면서도 베케트를 통해
이러한 진리가 즉 예외성을 가진 사건을 목격하는 장(場)으로서 문학을 다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탐색이 무한히 계속되는 이러한 간격이다.”
바디우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는데,
문학이라는 장 안에서 진리 사건을 탐색하는 자가, 탐색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간격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간격이 없다는 것은 그것을 메우려는 노력을 없게 하며, 에너지를 발동시킬 이유를 없게 한다.
바디우는 이 구도를 가리켜 사랑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아주 흔한 말로, ‘옆에 있어도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하나의 과제로서 메워야할, 더 가까야 가야 할 간격을 창출시키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이런 진리 사건이 있더라도 사랑이라는 구도를 가지지 못한다면 무한한 탐구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디우는 자신의 기본 철학의 구도를 베케트에 투영하여
진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바디우, 두 저자는 정치적, 사상적으로는 다른 철학자지만
둘 다 언어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베케트의 성격, 언어를 실용성, 서사, 익숙한 의미에서 해방시키는 것,
즉 어떠한 의미나 실용적인 도구로도 환원되지 않고
순수하게 언어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베케트의 작업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을 소진시키고 제거해버린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출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인 진리찾기라는 사건을 베케트의 작업에서 목격하는 성과를 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베케트의 텍스트 안에서 들뢰즈와 바디우가 반쯤은 조우하는 국면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서동욱 교수님께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들려주셨던 들뢰즈와 바디우의 베케트론에 이어
다음 시간에는 알랭 바디우의 국내 첫 제자인 서용순 교수님과 함께
‘바디우와 베케트, 희망으로 도래하는 사건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