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성이 채드를 이토록 변하게 했나

부유하고 개방적인 아버지를 둔 탓에 어릴 때부터 유럽 곳곳을 다니며 신문화를 섭렵한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 국내에는 영화화된 그의 초기 작품들(『나사의 회전』, 『데이지 밀러』,『여인의 초상』등)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지만 제임스의 찐(?) 팬들은 백미는 후기라고들 한다. 더욱이 후기 작품에 속하는 『대사들』은 작가 스스로 “어느 모로 보나 최고”라고 자찬한 작품이다. 이유가 뭘까. 그의 소설 중 이례적으로 (문제적 여성이 주인공이던 것과 달리) 중년 남성이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의 국면과 장면을 이끌었다는 점, (일인칭 시점의 사건 전개와 설명적인 초기작과는 달리)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과 작가와 거리를 두고 ‘장면’을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 (오직 주인공의 시선으로) 인물의 심리를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목격하듯 세심히 묘사하는 ‘심리적 사실주의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이 꼽힌다. 첫 쪽 넘길 때 이 책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을 넘기면 멋진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대개 사람은 잘 안 변한다고들 하는데, 헨리 제임스는 두 가지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 듯하다. 사랑과 문화. 『대사들』에서 사랑은 채드를 변화시켰고, 문화는 스트레더를 변화시켰다. 하지만 제임스의 소설에서 결국 남자를 변화시키는 건 ‘여자’다. 지성과 우아함, 열정을 장착한 여성들이 매 국면마다 나타나 매력 발산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끈다. 제임스의 소설에서 ‘문제적’ 여성은 주어진 삶의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기 삶을 사는 주체로 묘사된다. 이 책에선 21세기를 살다 타임머신 타고 19세기로 돌아간 듯 쿨하고 똘똘한 마리아 고스트리가 대표적인데, 그녀가 뉴잉글랜드에서 유럽으로 상경한 백면서생 스트레더를 이끄는 방식은 유연하다 못해 전지적(?)이다. 마치 그가 오기도 전 대본 다 쓰고 무대 세팅해 놓고 공연 대기하듯 장면마다 나타나 질문공세를 퍼부으며,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를 실토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마리아는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스트레더의 인식 변화를 느끼게 해 주는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채드의 가족이 신붓감으로 점찍어 데려온 매미도 만랩의 내공을 지닌 여성이다. 일찌감치 채드와의 결혼이 물 건너간 걸 알면서도 내색 않고 따라와 말끔히 주변 정리하고 제 삶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그런 성정 탓에 매미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진짜 짝 리틀 빌럼을 만나게 된다. 스트레더와 채드가 프랑스에서 만나게 되는 두 여인 비오네 부인과 그녀의 딸 잔도 지적, 감성적으로 성숙한 여성들이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비오네 부인의 세련된 감각과 열정이 도드라지는데, 그녀의 다면적 면모는 두 남자의 태도와 인식을 변화시킨다. 처신은 지혜롭고 똑 부러지게 하되 사랑은 무모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그래서 결국 전부를 거는 사랑스러운 여성. 비오네 부인은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원리원칙만을 고수하는 채드의 모친 뉴섬 부인과 그녀를 대변하는 딸 세라와 대결을 벌이는 형국인데, 이는 제임스가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국제 주제,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계승한 미국의 경직된 문화와 자유롭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유럽 문화와의 대비처럼 펼쳐진다. 문화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존재하는 유럽은 물질적 부의 축적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인식의 폭을 넓히고 삶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진짜 삶임을 여행자들에게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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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최대로 살아. 그렇게 안 하는 건 잘못이야.

자네 자신의 삶을 살고만 있다면 딱히 어 떤 삶을 사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자네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도대체 지금까지 얻은 게 뭐란 말인가?

(……) 뭐든 원하는 대로 하게.

그건 정말 실수였거든. 삶다운 삶을 살라고!

 

 

헨리 제임스는 이 책 『대사들』을 자신만만하게 독자에게 내밀며, “자 이것 좀 읽어 봐. 이제부터 삶의 총체성을 ‘보는’ 주체가 되어 삶다운 삶을 살라고.”라고 말 건네는 듯하다. 그러니 이제 마리아 고스트리와 비오네 부인을 만나러 가자.

편집부 이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