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선생님! 글을 쓰시느라 신발을 다 버리셨다고요?

안정효 선생을 직접 만나 뵌 것도 잠자코 헤아려 보자니 벌써 서너 해 전의 일입니다. 살아온 세월이나 관심사에 따라서 다소 생소한 분도 분명 계시겠지만, 여하튼 출판 쪽에서 일을 하거나 책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안정효’라는 이름을 틀림없이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과거에 텔레비전인지, 아니면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서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여하튼 안성기, 이경영 씨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 「하얀 전쟁」(1992)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일찍이 자극적인 영상을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인지라 참혹한 전쟁,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피폐해져 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뭐랄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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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얀 전쟁」의 원작, 즉 소설 『하얀 전쟁』을 쓴 분이 안정효 선생입니다. 머리가 굵어지고 훗날에야 알게 되었습니다만, 『하얀 전쟁』은 발표 당시부터 ‘베트남 전쟁’을 가감 없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한국군의 과오까지 전부) 묘사했다는 이유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답니다. 안정효 선생 스스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가능했던 작품이 아니었나, 조심스레 짐작해 볼 뿐입니다. 자기 경험에서 길어 올린 문장의 힘은, 아무래도 막연한 허구보다 강렬할 테니까요.

‘소설가 안정효’도 물론 유명하지만, 혹자에게는 ‘번역가 안정효’가 더 친숙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역을 처음 시작하였을 무렵부터 정확하고 신속하게 번역하기로 정평이 난 인물답게, 안정효 선생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옮겨진 외국 문학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패트릭 화이트 등 동시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장편 소설을 기적같이 빠르게, 수려한 문체로 번역해 내서 이어령 선생을 비롯해 여러 관계자들을 감탄시켰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덕에 ‘번역 문학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쏜살 문고로 함께 출간된 헤밍웨이의 『호주머니 속의 축제』는 ‘번역가 안정효’를 만나 보시기에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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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각조각 따로 굴러다니던 제 기억들은, 안정효 선생을 마주한 순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머릿속의 추상적인 존재, 이를테면 작가, 번역가일 따름이었으나, 직접 대화를 나누고 하루하루 써 오신 글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정말 ‘놀라운 분’이라고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제게 안정효 선생을 소개해 주신 분은, 로베르트 발저와 에두아르트 뫼리케의 작품을 번역하며 저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박광자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분은 부부셨지요.(입센의 『인형의 집』, 최근 『해마를 찾아서』를 번역하신 안미란 선생은, 또 두 분의 딸이셨고…… 번역가 집안이라니,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안미란 선생은 열 손가락에 이르는 언어를 배우셨다고 합니다. 말로만 듣던 ‘초다언어구사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을 뵙고 있자니 돌연 박광자 선생이, “안정효 선생은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느라 이젠 외출도 안 해요. 신발을 다 내다 버린 지경이라니까요.”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여전히 빈틈없고 정력적인 ‘지식 탐식가’이셨지요. 칸트가 그러했듯, 두 분도 늘 정해진 시각에 계획해 둔 일을 하시며, 말 그대로 칼같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저처럼 게으르고, 가끔 만사를 내려놓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 놀라운 일상을 들려주시던 차에 갑자기 제게 “최근 쓴 글이 있습니다, 보실래요?”라고 안정효 선생이 먼저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바로 『안정효의 자서전을 씁시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지요.

(뜬금없이 제 이야기를 잠시 늘어놓자면) 저도 종종,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제 일에 회의를 느끼곤 합니다. 내가 잘하고 있나?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 안정효 선생을 만났고, 비록 ‘칸트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지언정, 다시 최선을 다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지요. 『안정효의 자서전을 씁시다』를 편집하며, 그러니까 안정효 선생의 근면함과 철두철미함을 전부 목도하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현저해졌습니다. 결국엔 저도 부지런히 ‘자서전’을 써 보고 싶어졌으니까요.

먼 훗날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안정효 선생과 만났던 일화만큼은 꼭 들어가지 않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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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팀 유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