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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를 규정하는 담론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젊은이’의 종말을 꼽겠다. 물건을 사지 않고 해외여행도 다니지 않으며 정치에도 관심 없는 젊은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지 않음으로써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젊은이. 불안한 내면은 불확실한 행복을 쳐다볼 시간에 가능한 행복을 발명한다. 안주하는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사토리(득도) 세대. 젊은이라는 정체성은 현실의 영역에서 거의 다 폐기되었다. 이젠 누구도 타인을 향해 이겨내고 넘어서는 것이 진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웅 서사의 멸종. 그렇다 해도 사토리 세대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체념하고 득도하기엔 너무 일렀던 걸까. 미생이라면 또 모를까.

 

윤태호 작가의 웹툰이 2014년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미생’은 순식간에 한국 사회를 각성시키는 단어가 되었다. 미생은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거나 그런 상태를 뜻하는 바둑 용어다. 바둑판 위에서의 상태를 뜻하는 이 말은 삶의 무대 위에서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인생들을 비유하며 사회의 한 축을 비추었다. 이때 드러났던 인생들은 주로 청년실업, 비정규직이라는 환경에 둘러싸인 세대로,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으로 겪어 내는 세대를 미생 세대라 부르기도 했다. 미생이라는 말은 완생이란 개념을 전제한다. 그러나 ‘젊은이’가 폐기된 마당에 ‘완생’이라고 무사할까. 청년세대만을 뜻하지 않는 미생은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인생의 비유이자 그저 우리 모두의 상태다. 완생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영원한 미생.

 

더욱이 현실은 ‘기생’이다.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더 주목받는 영화 「기생충」은 “극과 극의 삶을 사는 두 가족의 만남이 빚어낸 스토리”다. 기생은 의지하는 생활 방식을 말한다. 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은 반드시 잃게 되는 제로섬의 연산이다. 이런 기생의 방식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이 일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제한적, 한정적 세계일 때 제로섬이 성립한다. ‘성장을 멈춘 시대’야말로 전 세계 경제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주먹이다. 저성장, 고실업이라는 공포가 전 지구적 세계 경제의 호흡 곤란을 유발하고 있다. 미생이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상태라면, 기생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못한 상태다.

 

“그냥 살아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그래서 상상된 공간이 사하맨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하맨션』은 “끝까지 같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 공동체의 이야기다. 작가는 홍콩의 실존 지역이었던 구룡성채에서 사하맨션의 모티프를 얻었다. 구룡성채는 홍콩 내 존재했던 중공의 영토로 양쪽 주권이 모두 미치지 못한 특수 지역이었다. 1994년 철거될 때까지 홍콩 정부가 수용을 거부한 난민과 베트남 보트피플 등이 모여 살았던 이곳은 무허가 건축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빈민촌이었다. 마굴, 무법지대라 불릴 정도로 나락 같은 곳이었지만 이곳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0.03㎢의 면적에 무려 5만 명이 거주했던 구룡성채는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가 만들어 낸 자생적 공동체였다.

 

구룡성채의 밤

구룡성채의 밤

 

작가는 왜 지금 구룡성채를 모티프로 한 공동체를 상상해야 했을까.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우리였을 수도 있고 내일의 우리가 될지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2014년의 우리와 메르스 사태를 겪었던 2015년의 우리, 촛불집회에 나갔던 2016년의 우리와 미투 운동을 함께한 2017년의 우리가 기존의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타운’이라 불리는 도시국가는 기업에 인수되며 탄생한다. 이윤 창출을 중심으로 주민을 솎아 내고 솎아 낸 주민을 유지하기 위해 소외와 배제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운용한다. 현실에 없는 공간이지만 현실의 어느 장소보다 리얼한 이유. 국가 부재의 위기에서 우리가 느꼈던 공포가 바로 ‘타운’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가질 수 없다면 가지지 않고도 행복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토리 세대는 지구상 가장 영리한 집단 중 하나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 드는 섭섭하고 허무한 마음마저 어쩔 수는 없다. 가지지 못해서 가지지 않는 것을 두고 선택이라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건 도피의 일종인 것 같다. ‘타운’의 대척점에 있는 ‘사하맨션’은 내몰린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분명하지만 이곳은 숨고 숨겨 주는 도피처만은 아니다. 타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사하맨션에서는 살 수 있는 이유. 국가 부재의 위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했던 희망이 바로 사하맨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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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편집부(문학2팀)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