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정해 만나지 않으면 마주칠 일이 없는데도 오래도록 연락을 나누는 친구들을 떠올려 보면 비슷한 점이 참 많은 것 같다. 겉보기에는 다르더라도 바탕이 똑같은 느낌. 나와 내 친구들의 그런 점 중 하나는 만날 때 시간을 애매하게 정한다는 것인데, 오늘 3시쯤 만나자 하면 결국 3시 30분이 넘어서야 모두 모이는 식이다. 때때로 나는 친구들보다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냉모밀을 먹자고 광화문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을 때에도 나는 15분 –너무나도 애매한 시간– 일찍 도착해 길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 바닥에 붙어 있는 기로소 터 표석을 보았다.

 

 

책의 사생활 삽입 이미지

 

기로소 터는 국가 원로의 명부를 관리하고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기 위해 지어진 관청이었다. 나이가 지긋해진 왕과 고위 관료 들을 모시던 곳이었다는 뜻인데, 친구가 오기 전까지 나는 아주 잠깐 동안, 기로소 터가 있었을 먼 옛날 그때의 장면을 그려 보면서 뻔하고 심심한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고급 요양 시설 같은 곳이었겠네, 그때는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게 지금보다도 훨씬 좋은 일이었겠지, 그때도 잔치 때는 잡채 같은 것을 먹었을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런 것뿐이었고, 그런 상상으로도 15분은 금세 흘렀다. 나는 곧 친구를 만나 기로소 터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

 

김탁환의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를 읽다 보면 기로소 터처럼 우연히 마주친 과거의 흔적들이 마구 구체화되며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허균과 정도전이 꾸었던 꿈,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황진이,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땅을 밟았던 궁중 무희 리심.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15분보다 훨씬 오래 그때의 삶에 붙들려 있다. 소설을 통한 생생한 만남이 쌓이고 쌓이면, 오랜 친구와의 공통점을 헤아려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관계를 이어 가듯이, 당시 인물들과의 관계가 어느덧 깊어져 있음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때부터는 굳이 마주칠 일이 없어도 약속을 잡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처럼 또 다른 책을 집어 들고, 책을 읽으며 다음 만남을 떠올려 보고, 멍하니 그때의 시간들을 걸어 보고…….

 

문학2팀 정기현

김탁환
연령 20~80세 | 출간일 2017년 11월 24일
김탁환
연령 20~70세 | 출간일 2017년 11월 24일
김탁환
연령 20~70세 | 출간일 2017년 11월 24일
김탁환
연령 20~70세 | 출간일 2017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