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징조와 연인들』 우리가 밤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

영화 밤치기 스틸컷

 

 

「밤치기」라는 영화가 있다. 정가영 감독의 장편 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감독 ‘가영’이 자신의 새 영화의 자료 조사라는 명목으로 술자리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진혁’과 두 번째 만남을 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가영은 ‘자료 조사차’ 진혁에게 첫 경험, 자위, 섹스에 대한 질문을 건넨다. 두 번 만나는 사이에 대답하기엔 민망한 질문을 받는 진혁은 당황하고 외면하며 정색하지만 가영의 몰아치는 멘트는 그칠 줄 모른다. 사실 영화는 영화고, 그건 다 됐고, 이 밤의 만남의 목적은 오로지 가영의 욕망, 저 오빠 꼬시고 싶다, 저 남자랑 어떻게 해 보고(?) 싶다는 쪽에 기울어 있다. 가영의 목적은 깊은 대화나 자료 조사가 아니라 바로 이 멘트를 치는 것이다. “저 오빠랑 자는 거 불가능하겠죠?”

 

이 영화가 ‘노골’의 끝에 서 있다면, 우다영의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그 반대에 서 있다. 반대라고 해도 될까? 옅게 시작해서 짙어지는 색의 그라데이션으로 설명하는 게 좋겠다. 「밤치기」가 새빨간색이라면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그 색이 옅어지고 옅어지는 쪽, 아주 옅은 분홍색 쪽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홍색 역시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베이비핑크 쪽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견 「밤치기」와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아마 ‘밤’이라는 시간에서 생겨난 은근하고도 강렬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던 시간. 낮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일들과 말하지 않았을 말들이 밤에는 있다.

 

『밤의 징조와 연인들』에 등장하는 관계는 어느 것도 노골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 비밀 아래 흐르는 징조들을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밤의 시간’에 벌어진 일들에서 말이다. 제목과 잘 어울리듯 소설집에는 무수한 밤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낸다. 이때 표제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의 연인들의 대화에서는 사랑과 이별의 기류를, 「노크」의 13살 연상의 슈즈 디자이너와 잡지 기자 ‘나’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과 수상하고 불안한 예감을, 「얼굴 없는 딸들」의 10대 소녀들이 주고받는 욕설에 드러나는 잔인하고도 든든한 우정의 생몰을, 「셋」의 낯선 남자가 오래된 여자 친구들 사이에 만들어 낸 어떤 환기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나의 하루, 그리고 그런 하루로 이루어진 커다란 나의 인생에서, 밤에 일어났던 일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 그러니까 나의 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우다영의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을 완독한 후 왠지 그 모든 밤을 나도 비슷하게 겪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구체적으로는 다르지만 정서적으로는 비슷한 기억에서 비롯된다. 십 대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학원까지 마친 후에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며 함께 걷던 친구와 나눈 대화나 입고 있던 교복, 이십 대에 처음 사귄 친구들과 홍대에서 들었던 노랫소리, 너무 많이 마셨던 술, 너무 솔직했던 이야기, 누구의 생에 없거나 있었을 그런 기억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밤이라니, 연말에 꺼내기 더없이 좋은 단어였던 것 같다. 연말에는 송년 모임도 회식도 많고 그 수많은 약속과 자리들은 모두 밤에 이루어진다. 모두들 고요하고 거룩한 밤, 낮보다 아름다운 밤들 되시길. 그리고 피곤하고 나른해진 몸을 끌고 침대에 누워서 아까 술자리에서 했던 재미있는 대화, 부끄러운 실수, 노골적인 데이트 신청, 비밀 얘기 같은 것들을 떠올릴 때 우다영의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도 함께 떠올려 준다면 좋겠다. 잠들기 전 침대 맡에 올려 두기 좋은 소설집이니까. 당신이 겪은 그 밤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과 이 소설집에 담긴 밤의 이야기들을 한 편 한 편 읽는 일은 별로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건 분명 이 겨울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김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