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가끔 난 행복해

philipp-berndt-173197-unsplash

 

 

없는 것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아. 이제 네 남편도 사라졌구나. 네 아빠처럼.”

 

어떤 소설을 읽고 나면 소설 속 등장인물보다 거기에 부재한 것들에 넋을 뺏길 때가 있다. 최근엔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을 읽었는데, 소설 속 젊은이들에게 미래라는 시간은 베일에 감춰진 듯 아득했다. 이 시대에 미래는 대체 뭘까? 에벌린 워의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에서 브라이즈헤드엔 더 이상 젊음의 열정이 없었다. 지나간 젊음 시절의 열정이란 대체 뭘까? 오르한 파묵의 『빨강 머리 여인』에서 빨강 머리 여인은 주인공의 인생에서 딱 한 시절을 함께 보내고 삼십 년 동안 사라진다. 그녀는 뭐였을까?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서도 ‘구’가 없다. 더 이상 없지만, 없음을 통해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구는 분명히 있었는데, 왜, 누가 이제는 없게 만들었을까? 아마 모든 소설을 이런 식으로 찾으면 하나씩은 다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애초부터 있는 것(현재)보다 없는 것(과거)을 그리는 예술이었고 있는 것(나)보다 없는 것(너)에 더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없는 것들은 더욱 더 ‘있었음’이 뜨겁게 드러나곤 한다.

 

죽음

 

“죽음은 삶을 입 다물게 하지. 결국엔 현실이 우리 적이야.”

 

그리고 『가끔 난 행복해』 속 여성들에겐 남편이 없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는 ‘가부장제’ ‘기혼’ ‘가장’ 같은 단어와 쉽게 얽혀 들어가기 때문에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소설 속에서 ‘남편’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동의어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아주 전통적이게도 이 소설의 남편들은 모두 여자를 떠난다. 전쟁 때문에, 눈사태 때문에, 심장마비 때문에……. 그런데 표면적인 이유 뒤엔 수많은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 전쟁 중 시그리드와 몰래 사랑을 나누었던 독일군 토마스는 정말 전쟁 때문에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게 맞을까? 아니면 그저 시그리드에게 돌아오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눈사태로 죽은 엘리노르의 남편은 왜 아내의 친구 안나와 함께 발견된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오르그의 심장마비. 급작스러운 충격의 순간과 가빴을 마지막 호흡 뒤에 또 다른 이유가 혹시 있지 않을까? 남은 엘리노르는 이렇게 말한다. “생이 끝나면, 살면서 일어난 일들은 수수께끼가 되어 버려.” 그렇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들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산 자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죽은 자들에게도 삶이 있었다는 것을 산 자들은 기억한 채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것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다른 세계에서 기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어.”

 

산 자의 고통 역시 전쟁, 눈사태, 심장마비에 비유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삶 자체가 내내 전쟁이며 눈사태며 심장마비다. 엘리노르는 남편 없는 세계에 홀로 남겨졌고, 사라진 자들이 알리지 않은 것들, 그리고 사라지고 나서 감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읊조린다. 그 독백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세상을 떠난 옛 친구 안나를 향한다. 아무 변명을 못 하는 죽은 자를 향해 산 자가 말을 건넨다. 죽지 못해 계속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산 자들만의 유일한 특권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남은 자들의 세계’에 있는 엘리노르는 산 자들끼리의 소통에는 자꾸만 실패한다. 사실은 노골적인 거부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왜 슬픈지 모르는 산 자들은 자꾸만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 설명해 주기를, 크게 울어 슬픔의 크기를 보여 주기를,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과거의 기억을 혼자만 안은 채 기대한 적 없는 삶에 맞닥뜨린 그녀는 의붓아들 내외와 손녀들과 점점 거리를 두며 “자진해서 선택한 추방 상태”에 머문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자신이 처음 이 세계에 홀로 독립했던 누추한 장소에서 혼자만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있는 것’, ‘현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산 자에겐 죽은 자들이 갖지 못한 것,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

 

행복

 

“사라지지 않는 건 없어. 뭐든 그저 지나치는 무언가일 뿐이야.”

 

엘리노르는 자신의 남편 헨닝이 친구인 안나와 함께 사고로 죽고 난 후, 친구 안나의 남편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가 된 게오르그와 남은 평생을 함께한다. 처음에 이들의 대화 주제는 사라진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자신들의 이야기를 더 길게 하기 시작한다. 의식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함께 사는 삶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결국 친구의 남편은 자신의 남편이 되고, 옛 남편과 친구는 기억 속에서 멀어지는 때도 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곁에 있던 사람은 언제나 사라진다. 마치 게오르그처럼. 죽음은 언제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들이 깜빡이듯 찾아와 세계를 반짝이게 만든다. 계속 켜져 있는 사무실의 백열등보다 다채롭게 깜빡이는 알전구가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살아 있음’이 품은 ‘사라짐’의 미학을 무의식 속에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집, 가족, 사랑, 이웃, 돈, 우정—이 언젠간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고 반복하면서도 엘리노르가 결국엔 인정하는 것은, 그럼에도 “가끔 난 행복해.”라는 고백이다. “가끔”, 정말 “가끔” 말이다. 당신은 이제 없지만 난 아직 여기 이곳에 있고, 그래서 대부분은 슬프지만 그래도 가끔은 행복하다고.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내비칠 수 있는 비소(悲嘯) 아닐까.

 

민음사 편집부 허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