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빙봉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는 ‘상상친구’입니다. 빙봉은 코끼리 코와 고양이 꼬리, 솜사탕 몸을 가진 돌고래로, 어린 시절 라일리가 좋아했던 모든 것을 합친 존재입니다. 빙봉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를 연료 삼아 달나라까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빙봉은 라일리의 가장 가까운 놀이친구였지만, 라일리가 커 가면서 빙봉과 함께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됩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과 라일리

 

 

어린 시절 제게도 그런 상상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토마트. 지금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렴풋한 느낌만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토마트와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해서, 집 앞 골목 어귀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날 결국 토마트를 만났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나중에 어른들이 해준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한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토마트는 제 유년기가 끝나며 함께 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상상친구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異名)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빙봉과 토마트가 떠올랐습니다. 페소아 역시 자신의 첫 이명은 아주 어린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과 달리 그의 이명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많아지고 더욱 정교해지며, 이명과 자아가 뗄 수 없는 관계로 구축됩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내 주변에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친구들과 지인들로 나를 둘러싸는 성향이 있었지.(그들이 진짜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던 게 나였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네만.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들처럼, 독단적이면 안 된다네.)”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해설 「시인, 페소아」,『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서

 

가명을 사용한 작가들은 페소아 말고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페소아의 이명은 가명과는 다릅니다. 독자적인 문학관, 스타일과 개성을 갖추고 있으며, 이외에도 생년월일, 구사하는 언어, 직업, 살아온 배경이나 정치관 등 작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까지도 치밀하게 설정된 이명이 여럿입니다. 그중 가장 위대한 시인의 경지에 오른 이명 3인방이 있으니, 바로 알베르투 카에이루와 리카르두 레이스, 그리고 알바루 드 캄푸스입니다.

 

 

카에이루(왼쪽)_레이스(가운데)_캄푸스(오른쪽)

 

 

페소아에 따르면, 그는 제일 먼저 ‘복잡한 성격을 가진 전원시인’ 알베르투 카에이루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카에이루의 제자인 ‘우아한 고전주의자’ 리카르두 레이스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고도 충동적으로, 모든 면에서 리카르두 레이스와 대조적인 알바루 드 캄푸스가 등장합니다. 캄푸스답게 급류를 타고, 벼락같이 찾아온 것입니다.

 

내가 카에이루, 레이스 그리고 알바루 드 캄푸스의 이름하에 쓴 모든 것은 진지한 것들이라네. 각자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이 세 명 모두를 통해 나는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신비로운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공통적으로 흐르도록 했다네.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해설 「시인, 페소아」,『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서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 창조 능력은 자연스럽게 방대한 양의 글을 써내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폭발적인 창조 능력을 제대로 발산하기 위해서 이명이라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그는 생전에 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행운이 따르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쓴 수많은 글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정식으로 출간한 책은 자신의 본명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름으로 출간한 시집 『메시지』 한 권뿐입니다.

이명 가운데 페소아가 가장 존경하는 이는 카에이루, 사랑한 이는 캄푸스, 완성도가 높은 건 레이스입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스스로 제일 싫어한 게 바로 페소아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들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약간씩 다른 자아를 운용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SNS 등을 통해 ‘나와 다른 나’를 연출하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페소아와 이명의 관계, 그리고 그가 이명과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낯설지 않습니다.

 

 

페소아 시선집

 

 

민음사 세계시인선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는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그리고 페르난두 페소아의 『메시지』를 실었습니다.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는 알바루 드 캄푸스의 대표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국내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에서 직접 페소아의 문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김한민 작가가 엄선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국내에 거의 처음 소개되는 시인으로서의 페소아에 대한 세심한 해설을 함께 실어, 이 두 권의 시집으로 그의 시 세계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페소아보다 더 페소아에 가까운, 그의 ‘상상친구 일당들’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인문교양팀 이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