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평범한 이야기 『네 이웃의 식탁』

부모가 된 지 벌써 5년째다. 정확하게 6년 전에 나는 기차를 탈 때 가까운 곳에 아이가 있으면 오늘은 운이 없네, 조금 짜증을 냈다. 노트북이나 책을 가져간 카페에 어린아이가 있기라도 한다면, 녀석이 소란스럽든 그렇지 않은 상관없이 도끼눈을 떴다. 왜 아이를 데리고 이런 곳에 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육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아이 둘의 아빠다. 그사이 세상에는 ‘노키즈존’이라는 게 생겼고, 관련된 기사에는 이른바 개념이 없다는 부모(주로 엄마)를 향한 준엄한 가르침과 저열한 혐오가 뒤섞인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손님으로 받고 싶지 않다는데 나도 가고 싶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든 특정한 대상을 뭉뚱그려 범주화하여 배제하는 행위는 마뜩찮지만, 그런 생각 길게 할 여유가 없다. ‘무개념’이라는 소리 안 들으려면 지금 당장 아이부터 챙겨야 하니까. 이웃의 시선에 나와 내 아이를 맞춰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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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을 읽고 ‘역시 아이는 낳지 않아야겠어.’ 혹은 ‘그래 답은 비혼이다.’ 하는 다짐을 했다는 독자의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본다. 결혼과 출산은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달린 일이다. 그런 개인들의 판단이 모여 지금의 저출산 사회를 만들었다. 인간은 최대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려는 동물이고, 이 소설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일지도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이번 소설은 합리성의 재현인 셈이다. 그것도 소름끼치게 리얼한.

육아와 가족과 이웃에 고통 받는 인간들이 잔뜩 나오는 이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의 아이를 합하면 셋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평균(?)은 했다. 『네 이웃의 식탁』은 이런 평균적인 인간이 아이를 키우며 생길 수 있는 흔한(????) 일들을 특별한 공간에 담아 내어놓는다. 그것을 평범한 당신은 읽을 것이다. 평범한 우리는 쉽사리 약자를 혐오하고, 약자인 여성과 그 약자 품의 약자인 아이의 합은 세상 별의별 성가심에 잘도 노출되어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생각이라고? 너무 극단적이라고?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시 말하자면 『네 이웃의 식탁』은 네모반듯한 어떤 평균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치 아빠가 되기 전, 이웃의 아이를 귀찮아하고, 아이의 ‘엄마’는 대체 무얼 하는지 평가하기에 바빴던 나처럼. 그때의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도 같다. “에이, 극단적이네. 아이고, 너무 나갔네요.” 이런 말을 하는 나의 뼈를 구병모의 길고 정확한 문장으로 때릴 수 있다면 실컷 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 이것도 너무 극단적인가?

 

 

에디터 서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