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소네트』&『착하게 살아온 나날』―거슬러 올라가는 독서에 대하여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을 처음 마주한 건 엄마의 책장에서였습니다. 동화책은 지루해서, 뭐 읽을 게 없나 기웃거리다가요. 이건 어른들이 읽는 책이라고 으스대는 듯한 몸피 큰 책들 사이에서 선생님의 수필집은 ‘만져도 괜찮아. 펴 봐도 괜찮아.’라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뽑아 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어땠냐고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순수함을 ‘머리’로 이해할 시기도 아니었거니와 선생님의 서정성은 그 이상으로 고매했습니다. 한자는 왜 이리 많은지, 남의 집 딸 이야기를 내가 대체 왜 읽고 있어야 하는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일찍’ 만나 버린 거죠. 선생님의 책을.

 

사람과의 인연은 알 수 없다고 하듯, 저는 책과의 인연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책을 지루하게 읽던 아이는 자라서 그분의 책을 편집하는 편집자가 되었으니까요.

 

기왕 솔직하게 말한 거, 더 솔직해질게요. 부끄럽지만 저는 피천득 선생님이 1세대 영문학자였고 셰익스피어를 사랑했으며, 동서양 유수의 시들을 읽으며 시인을 꿈꿔 온 것을 그분의 번역 시집『셰익스피어 소네트』와 번역 시 선집『착하게 살아온 나날』 원고를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셰익스피어소네트_표1 착하게살아온나날_표1

 

 

“내가 시와 수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동심과 맑고 고매한 서정성, 그리고 위대한 정신세계입니다. 특히 서정성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시와 수필의 본령은 그런 서정성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책에 실린 시인들은 하나같이 올바른 시인의 자세를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착하게 살아온 나날』 서문에서

 

선생님의 선생님이 되어 준 시들을 찬찬히 짚어 보는 과정은 흥미로웠습니다.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처럼 선생님이 생전에 애송했던 시에서는 선생님의 냄새가 났습니다. 시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정서에 알맞게 번역하려는 시도도 곳곳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정형시를 한국의 시 형식에 맞춰 새로 써 보인 것이 예가 되겠네요. 바이런, 워즈워스, 예이츠, 디킨슨 등 서양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도연명, 두보, 보쿠스이, 타고르 등 동양 시인의 시도 두루 수록한 것은 어느 한 쪽도 섭섭하지 않게 하려는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시대와 지은이는 달랐지만 그것들은 ‘피천득’이라는 이름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저는 선생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명시들과 시인인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다시 『인연』을 펼쳤습니다. 어땠냐고요? ‘제때’에 선생님을 만났노라고,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의 한 소설가는 자신의 독서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를, 그 스승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 간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분들께 이 두 권의 책 『셰익스피어 소네트』와 『착하게 살아온 나날』을 추천드려요. 피천득 선생님을 모르는 분들께도 동일하게 권해 드리고 싶네요. 물론 엄마의 책장과 같이 로맨틱한 만남은 아니겠지만, 모르는 일이잖아요? 책과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질지.

민음사 편집부 이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