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기획서만 보고 단번에 표지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부분 원고를 읽고, 분석하고, 회의를 거쳐 레퍼런스를 찾아보고, 이것저것 방향을 잡아 보고, 아니다 싶으면 버리고, 다시 하는 등의 과정에 힘을 쏟다 보면 책의 방향이 잡히고 작업을 통해 물성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무려 ‘9권’이라……! 처음 이 책의 기획서가 나에게 넘어왔을 때 지레 압박부터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 되겠다는 예감이 듦과 동시에 어떤 모습으로 결과가 나타날지 기대되는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나를 참 많이 움직이게 했다.
요즘 시대에 ‘현대적’, ‘서구적’, ‘모던’, ‘심플’, ‘시크’ 등등의 단어들에 걸맞은 ‘한국’의 디자인이 어색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한국 산문선』만큼은 그저 ‘한국’다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자료를 찾아보던 중 문자도, 책가도, 산수화 등 평소 너무 당연해서 지나쳤던 우리나라 고유 민화들의 특별함이 눈에 들어왔고,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민화를 자세히 본 적이 있었나? 형식이 뻔하지 않네? 색이 이렇게 다채로웠었나? 발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자료를 모아 보던 중 생각보다 열악한 자료에 좌절했고 얼마 되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온라인상에도 자료가 적진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민화의 질감, 분위기, 깊이를 관찰하기에 모니터 화면은 전달력이 턱없이 부족할뿐더러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러 근거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정보도 너무 많아 분노마저 차 오르던 터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음 날, 고민의 여지 없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그 이후 적어도 두어 번 정도 더 드나들며 인터넷에서 만날 수 없는 자료를 모으고 원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원본을 실컷 볼 수 있는 두 박물관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표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마침내 선보인 『한국 산문선』 표지에는 우리 책의 원문을 담아낸 두루마리들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사이에 한국 민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의미의 물건들이 전권에 걸쳐 배치되었다. 표지들을 이으면 두루마리들이 맞아 떨어지면서 9권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되도록 디자인했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샘플북과 필사 노트 디자인도 이어 갔다. 조선 시대에는 서양화식 투시 원근법이 도입되면서 한국 민화에도 적용되었고, 어느 순간 동양의 원근법인 부감법과 융합되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특히 책거리, 책가도에서 잘 드러나 엿볼 수 있는데, 그 특징을 각 권의 대표 물건들을 끌어모아 그 시대 원근법으로 다시 구성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작업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디자인 방향을 잡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다.
『한국 산문선』 표지 디자인에 골몰하다 민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보게 되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옛날 집에 민화 하나가 딱 걸려 있는 사진을 보고는 ‘일시 정지’를 눌러 한참을 쳐다보았다. 낯설면서도 굉장히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시대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사람들이 민화 한 폭을 사서 걸어 놓고 길상의 의미를 구하며 공간을 장식했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내가 디자인하여 누군가의 공간에 이 책이 놓였을 때 그런 뜻과 의미가 더해진다면 참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표현하고 싶은 디자인 방향이 비로소 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만나고, 읽고, 책장에 꽂아 둔 사람들 모두가 풍족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미술부 박권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