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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여 년 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었다. 이 책의 첫 장면은 이렇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엔 피가 가득하다. … 당신이 나를 죽인 그 후레자식을 찾아낸다면 당신에게 저세상에서 본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겠다!”

나는 첫 문장부터 사로잡혔다. ‘장편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려면 이 정도 흡인력은 있어야지.’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뒤가 궁금해 도저히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서두였다. 한동안 사람들에게 오르한 파묵의 책을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처음부터, 어쩜 이래?”

올해 말 한국에 출간된 그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의 첫 부분은 이렇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만났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 개들은 여전히 미친 듯이 짖어 댔다. 잠시 후 귀뮈쉬데레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 어둠 속에서는 여자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 소형 트럭의 미등 불빛이 멀리 보였다. … 그가 (트럭의) 뒷문을 닫을 때 번개가 치면서 하늘, 산, 바위, 나무, 사방이 먼 기억처럼 밝아졌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 … 사촌 형 코르쿠트의 결혼식에서 본 여자애가 아니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그 애의 언니였다.”


나는 원고를 읽으며 10여 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 생각했다. ‘처음부터, 어쩜 이래?’

이 소설은 메블루트라는 소년이 첫눈에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3년간 연애편지를 쓰고 결국은 둘이 공모하여 마을을 도망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메블루트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진심을 담은 편지만으로 여자애를 설득해 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성공적으로 데려온 여자애를 보니 처음 반했던 그 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정말 어떡하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순간적으로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서늘함. 그렇게 파묵은 또 다시 10여 년 전처럼 나를 완전히 낚아 버렸다.

이야기는 중부 아나톨리아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메블루트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요구르트를 파는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로 건너온 때부터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나서까지 이어진다. 약 40여 년의 일대기를 담은 방대한 장편이다.

결국 메블루트는 그 잘못 데려온 여자애와 결혼을 한다. 예기치 못한 일이지만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맑은 눈’으로 묘사되는 메블루트는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캐릭터여서 나는 보도자료에 대책 없이 정직한 메블루트라는 표현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생의 일이 꼬일 때마다 대책 없이 정직한 선택만 해 버린다.

예컨대 메블루트는 밤마다 보자라는 터키의 전통음료를 팔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웨이터, 아이스크림 장수, 매니저, 주차장 경비, 전기료 징수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데 매니저로 일할 때는 직원들이 사장 몰래 돈을 빼돌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눈감아 주다가 도리어 자신이 모함을 당해 쫓겨난다. 길에서 병아리콩밥을 팔 때는 경찰에게 밥 수레를 빼앗기는데 사촌들의 연줄로 압수된 밥 수레 중 아무거나 고를 기회를 얻었지만 진짜 주인이 자신처럼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을 떠올리며 빈손으로 돌아온다. 전기료를 징수할 때도 여느 탐욕스럽고 강압적인 징수원들이 전기를 바로 끊어버리는 것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조용히 불법 전선을 보았다는 눈빛만 보낸다.

그런 그에게서 묵직한 위로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에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누구도 교묘하게 빠져 나가기만 하며 살 수는 없다는 것, 온몸으로 정직하게 충돌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세상 속에서도 이기는 사람 뒤에는 언제나 지는 사람이 있어 준다는 것, 이겨야지만 삶이 온전히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조금은 더 이타적인 생각을 하는 따뜻한 사람이 꼭 있다는 것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 같은 것들이 원고를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슬며시 다가와 마음을 간지럽혔다.

밤마다 보자를 메고 묘비를 거닐며, 또 가끔은 개들에게 쫓기며 홀로 이상하고도 낯선 생각들에 빠져들고 인생에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아 헤매는 메블루트의 무거운 어깨를 그리면 인생이 주는 고독감이나 쓸쓸함 같은 것의 실체가 조금은 그려지는 것 같다. 메블루트 머릿속의 낯선 상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인생을 살며 한번은 느껴봄직한 어떤 낯섦과 닮아 있다.

파묵은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첫 페미니즘 소설’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 소설에는 터키의 여성들이 처한 현실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메블루트와 결혼한 라이하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자매들의 억압된 결혼생활과 아이를 키우며 겪는 부침이 독백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또 파묵은 ‘나 같은 먹물이 아닌 노동계층이 본 이스탄불을 그리고 싶었다.’고도 표현했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작가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온 이 소설이 반가울 것이다. 팬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랜만에 방대한 서사와 몰입감 넘치는 서사가 주는 소설 본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만하다. 한 보자 장수의 일대기와 이스탄불이라는 매력적인 도시의 현대사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그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 『내 마음의 낯섦』은 추운 겨울,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줄 그런 책이다.

출간일 2017년 10월 31일
수상/추천 뉴욕 타임스 외 1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