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사생활_모두다른아버지1

나는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이었다. 한국문학을 좋아했고, 계절마다 발표되는 단편소설을 읽는 모임에 들어가 새로 나온 소설들을 꾸준히 따라 읽었다. 다만 나는 고유명사를 기억하는 것에 정말 취약했고, 기껏 열심히 읽은 단편소설들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곧잘 잊어버리거나 엉망으로 바꿔 부르곤 했다.

그러나 2016년 봄, 이주란 작가와 그녀가 쓴 「모두 다른 아버지」는 잊지 않았다. 평생토록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킨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둔 이복형제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 속 아버지는 ‘나’와 이복형제들에게 똑같이 ‘수연’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동명이인인 동시에 형제이기도 한 기묘한 관계의 사람들이 강화도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에는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것이 수맥처럼 흐르고 있었다.

흔한 플롯인데도 잊지 못할 이야기가 된 것은 이주란 작가의 소설이 가진 독특한 질감 탓이었다. 흐물흐물하고, 미끌미끌한 무언가가 떠오르는 소설이었다. 그 당시에는 구체적인 명사를 들어 비유하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전 SNS와 유튜브에 한창 유행했던 ‘액괴’를 만져 보고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체도 액체도 아니고, 흘러내리고 미끌미끌하면서도 끈끈한, 그러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묘한 중독성을 가진 고유하고 독특한 질감. 이주란 작가의 소설이 그랬다.

입사하고 처음 받은 소설집 원고가 이주란 작가의 것이었다. 교정지와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속으로 조용히 반가워했다. 「모두 다른 아버지」를 처음 읽고, 이주란 작가의 이름을 기억했을 때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아직 첫 책이 없는 작가네. 언제 나올까? 소설집 나오면 사야지.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을 만들고 있었다.

책으로 묶이기 위해 준비된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 내는 가족 서사에 감탄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다른 아버지』는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 가족이 나왔다. 차마 남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속사정과 불화의 서사를 실어 나르는 문장의 톤은 독특했다. 나는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이주란 작가의 소설 속 화자처럼 말하는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다. 21살에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 이복동생을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스물하나에 뭘 했더라? 남자에게 차여 식음을 전폐한 뒤 말라 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쁘지 않았군.”이라 말하는 입담은 능청맞으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이주란 작가의 모든 소설이 그랬다. 자학을 섞은 농담 뒤에 도사린 서늘하고 서글픈 삶의 모습을 그렸다. 등단작부터 차곡차곡 쌓인 소설을 따라 읽으며 작가의 변화와 변주를 보는 것이 좋았다.

책이 완성되어 편집부에 도착했을 때 이주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봄을 떠올렸다. 이주란 작가의 소설을 쫓아 읽어 온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주란 작가를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액괴’를 한 번 쯤 손에 쥐어 봐 주기를 바랐다. 이 독특하고 중독성 있는 촉감을 한 번만 느껴 주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부터는 손이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문학 2팀) 김유라

이주란
연령 15~60세 | 출간일 2017년 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