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귀환』 북디자이너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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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들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원고들은 일정 회의를 거쳐 미술부의 담당 디자이너와 만나게 된다. 『스피노자의 귀환』에 앞서 내가 작업했던 두 권의 철학책 모두, 첫 만남이 참으로 데면데면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제목에서부터 편집자가 말하는 스피노자의 권위, 친근함, 위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고 아마 그 친근함은 영화 「반지의 제왕」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시리즈 중 ‘왕의 귀환’을 제일 좋아했다…….)

철학 논문을 모아 놓았으니, 전공자도 아닌 내가 원고를 꼭꼭 씹어 소화하기엔 버거운 일이었다. 우선 전체를 훑으며 숨을 고르고 필요한 단어와 문장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집자가 일러 준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 1장 「스피노자의 삶」을 읽다 보니,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이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이미지”를 보여 주는 스피노자라는 인물에 먼저 마음이 갔다.

주류에서 벗어난 별종으로 적이 많았던 스피노자.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오로지 기쁨과 전망만을 믿었던 스피노자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제3의 눈인 렌즈 세공 일로 생계를 꾸리다가 외롭고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희망을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용기도 믿지 않았다. 그는 기쁨 그리고 전망만을 믿었다.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단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 보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제3의 눈으로서의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 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 ─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26~27쪽

 

겸손하고 검소하며 순수했던 스피노자의 삶은 왕좌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귀환’이라는 제목이 부여된 만큼 그의 권위와 긍정의 세계를 표지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가 쉽게 떠올리는 스피노자의 선하고 귀여운 얼굴에 왕의 망토를 둘러 줌으로써 또 하나의 포인트였던 위트를 표현하려고 했다. 특히 본문의 표제지에서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서 책의 무게감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깨알 같은 재미를 주고 싶었는데 편집부에서 거부감 없이 바로 받아들여 내심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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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어깨와 머리 위에 놓인, 전통적인 블랙레터에서 장식을 덜어 낸 고딕 스타일의 Baruch Spinoza는 왕관처럼 혹은 왕가의 문장처럼 역할해 주길 바랐다. 스케치를 하면서부터 이 장식은 군청박으로 후가공 처리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기쁨과 긍정의 노란색 그리고 황제의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는 짙은 군청박의 조화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후가공으로 군청박을 꼭 한 번 써 보고 싶은 욕망이 제일 컸다…….) 모두가 치열하게 고민했던 바탕색 전쟁에서 노랑이 승리를 거머쥐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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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덜 띈다고 해서 과연 삶도 그만큼 적다고 할 수 있을까”
─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중에서

 

양장본의 재킷을 벗기면 보이는 속표지는 선택되지 못한 시안을 활용하는 등 비교적 마음껏 끼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다. 여러 가지 속표지 디자인을 시도하던 어느 날, 열화당에서 기획한 ‘존 버거의 스케치북’ 전시를 보러 갔다. 평소 열화당에서 출간하는 존 버거의 책들은 화려하지 않아 오래 바라보게 되고 손에 쥐었을 때 몸과 마음이 안정되곤 했기 때문에,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것만 봐도 마냥 좋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스피노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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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서는 예전에 장바구니에 담아 놓았던 『벤투의 스케치북』의 드로잉과 글귀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제야 벤투가 스피노자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포르투갈계 유대인인 스피노자의 라틴어 이름 ‘베네딕투스’는 포르투갈어로 ‘벤투’!) 이런 예상치 못한 쑥스러운 만남은 스피노자와 존 버거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솟아난 애정을 속표지에 Benedictus de Spinoza로 옮겨 놓았다.

재킷에서 노란색과 파란색의 대비가 강렬했기에 속표지는 보다 담백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유광의 군청박이 너무 도드라지지 않게끔 같은 톤을 고려해 유광 코팅을 선택했는데, 사실 머릿속에서는 겉표지의 군청박과 색상 차이가 거의 없는 더 짙은 색을 의도했기에 이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스피노자의 삶」 첫머리에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읽고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한 수리공의 이야기를 인용해 두었다. 수리공의 이야기를 듣던 청자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를 접근하는 데, 그것도 나쁜 방식은 아니군요. 저서보다는 인간을 통해서 접근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문득 여기에서 ‘그러나……’ 이후의 문장이 궁금해졌다. 이제 스피노자의 목소리에 접근해 보려 한다. 인간 스피노자의 주변만 맴돌다가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조금 더 다가가게 된 것처럼, 독자들도 어디선가 우연히 스피노자를 만나 그 인연이 『스피노자의 귀환』까지 닿기를.

 

민음사 미술부 유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