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질료로 사용하는 예술인 시와 소설 중 특히 시는 언어의 감각에 보다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 있는 것’과 ‘살아 내는 것’이란 말에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살아가다’의 앞으로 느리게 전진하는 움직임, ‘살아 있다’의 느릿한 호흡과 ‘살아 내다’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견딤이 보이시나요?

가수 이랑은 『신의 놀이』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란 본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의 성격을 띠고, 그렇다면 말을 가지고 노는 시 역시 신의 놀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준현의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은 이런 말의 놀이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민음의시232_흰글씨로쓰는것_입체북

또 시를 썼니?

나의 시어들, 나의 싫어는 나의 실언은 언제나 나의 실어들

볼일을 보는 개처럼 말야

볼일도 안 보려는 사람들의 얼굴을 말야

 

그러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수십 마리의 귀신들은 어찌나 창백한지 몰라

전부 리을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 무릎 꿇은 수많은 리을들을

가진 이름을 갖고 싶어

 

– 「이 시는 육면체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시인의 시어는 싫어이자 실언이자 실어가 됩니다. 소리 내어 읽으면 비슷한 소리가 연쇄되어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려도 소리의 뜻은 전혀 다르죠. 그렇게 단어와 단어 사이에 생긴 공백이라는 지면에서 시어는 ‘싫어’가 되었다가 ‘실어’가 되지요. 신기한 것은 이 비슷한 소리를 내는 단어들을 한곳에 붙여 놓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의미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소리 말고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단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곧 싫어는 실어가, 실언은 시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감각이 피어나지요. 하지만 여전히 단어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의미의 벽이 굳건히 서 있고, 우리는 그 사이를 감각이란 유령으로 넘나들 뿐이지만요.

 

이런 시인이 사랑에 대해 쓴 시는 어떨까요?

 

두 갈래로 나뉜 이어폰이

귀와 귀로 이어져 있다

 

귀와 귀가

어긋나는 젓가락처럼 어긋나는 가락처럼

다른 귀와 닮은 귀

 

(……)

 

속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감정을

하나의 감정으로

믿고 사랑하다가 죽겠다고 말하는 단 하나의 감정

 

―「둘의 음악」에서

 

시인은 연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고 선을 긋습니다. 이어폰이 귀와 귀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단독자 두 사람은 하나가 되는 대신 연결이 되죠. ‘속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감정’은 나와 그 사람이 개별적인 존재인 이상, 서로 사랑하더라도 그 감정은 오직 나만의 것이고 결국 두 가지의 감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감정을 지니고 같은 사랑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인의 정서는 다음의 시에서도 이어지는데요.

 

그렇다면 나더러 검은 돌이 되라는 소리야?

혼잣말을 하는데

옆방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헐떡거렸어 혼잣말보다 의미가 없을 수도

있구나, 두 사람의 소리란

 

세계는 두 사람의 것인지도 몰라, 비가 내린 다음 날

세계는 천천히 식어 가고

세계는 겨우 두 글자로도 쓸 수 있지

 

(……)

 

이제 우린 둘이다 사람을 자주 바꿔 가면서 나는 둘이 되었다

 

중국집에서 중국에는 없는 중국 음식을 먹으며

중국에만 있는 중국 음식을 검색하며

서로 킬킬거리거나

몸을 섞으면

 

우리는 걸레처럼 잘 마르는 체질이고 잘 더러워지는 체질이다

 

붓을 말리는 동안에는 시를 썼다

모든 글씨는 집단적이고

나는 집단적인 현실을 읽어 왔다 사람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많은 글자를 썼고 나도 그중의 한 글자만큼 집단적인 감정을 가졌다 불경만큼 긴 소설을 쓰고 싶을 정도로

 

– 「음과 악 ― It’s wonderful life」에서

 

음과 악 둘로 나뉜 이 시는 사랑에 대한 환상 보다는 담담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정말로 나와 당신이 물처럼 녹아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어폰을 나눠 낀 귀와 같은 존재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홀로 있는 외로운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시인이 시에서 말했듯 모든 글씨는 집단적이지요. 자음과 모음, 획과 획이 모여 글씨를 만들고 그 글씨가 모여 단어를 만듭니다. 시인은 자신이 세상에 홀로 붕 떠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부정하지 않고, ‘불경만큼 긴 소설을 쓰고 싶을 정도로’ 라고 말합니다.

 

말의 놀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차이의 감각은 오로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낙차이지요. 단어를 쪼개고 나누고 붙이고 연결시키는 시인은 기존에 지었던 집을 허물고 그 집에서 나온 재료들로 다시 새로운 집을 짓는 것 같습니다. 오직 시인의 감각으로 지어진 그 집은 바닥에 창문이 달렸고, 문은 밖으로 통하지 않는 이상한 집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런 집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집을 이렇게도 지을 수 있구나, 하고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김준현 시집을 통해 말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라고 느끼게 되듯이요.

 

민음사 편집부 김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