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는 초서로 쓰여 있다. 초서는 한자의 자획을 생략해서 흘려 쓰는 필기체인데 웬만큼 한문 공부를 한 사람들도 알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치열한 전쟁 중에 더욱 심하게 흘려 쓴지라 일반 사람 눈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글자인지조차 파악이 안 된다. 조선 정조 때 『난중일기』를 포함해 이순신 장군이 남긴 글들을 모두 ‘판독’해서 『이충무공전서』를 만들었는데 그 당시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글자가 있을 정도다. 일제 강점기 때 다시 이순신 장군의 초서를 판독했지만 이 『난중일기초』 역시 미흡한 부분은 많았다. 그럼에도 후대의 연구자들은 초고본 없이 이 두 판본을 토대로 연구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초고본, 즉 국보 76호로 지정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가 1967년에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난중일기』의 수난은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번역본을 낼 정도로 『난중일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인 이종옥이 현충사와 이순신 장군 묘소 부지를 담보로 일본계 은행에 큰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일본 왕족도 나서서 『난중일기』를 넘기면 벼슬자리까지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932년에 전 국민적 성금 모금 운동이 일어나 『난중일기』를 겨우 지켜 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또다시 『난중일기』가 일본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1967년 마지막 날 밤, 유근필 무리는 현충사 사당 옆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난중일기』를 철문을 부수고 훔쳐 낸다.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수사하며 모진 고문까지 행했지만 밝혀지는 것이 없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례없는 특별 담화까지 발표한다. 담화 발표 다음 날 걸려온 어린 학생의 전화 한 통으로 『난중일기』가 일본으로 반출되기 직전 범인들을 검거하게 되는데, 주모자였던 유근필은 전직 중학교 교감이었고 제보자는 그의 조카였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초고본은 철저한 보안 속에 둔 채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영인본만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2004년이 되어서야 디지털 정보화 사업을 위해 초고본이 다시 공개되면서 새로운 내용들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몇십 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초고본을 최대한 복원해 낸 이번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에 관한 새로운 정보뿐 아니라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순신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도 모두 담겨 있다.


『난중일기』 초고본  中  「정유일기 5월 21일」  

[민음사 편집부 신지영]

이순신 | 옮김 노승석
출간일 2010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