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서가를 더듬다 장석주의『햇빛사냥』을 끄집어냈다. 1981년 4월에 발행된 1200원짜리 시집. 질 나쁜 갱지에 박혀 있는 시어들. 그리고 그 밑에 가는 연필로 그어 놓은 줄과 깨알같이 적혀 있는 메모. 생전의 그를 떠올리는 순간 엽서 한 장이 책갈피에서 굴러떨어졌다. 출판사 회수용으로 만들었던, 부치지 못한 독자 엽서다. 또박또박 쓴 글씨로 직업: 학생, 좋아하는 시인: 장석주, 이름: 기형도 등이 적혀 있다.”(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나의 글 나의 서가’에서)
그렇게 한때 순수한 문학청년이었던 기형도는 『입 속의 검은 잎』을 남기고 비록 떠나갔지만, 그가 사랑한 시인 장석주는 남아 열네 번째 시집 『몽해항로(夢海航路)』를 선보였으니,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독자가 아닐 수 없다.
 이 시집은 절대자유와 무위자연의 삶을 실천하며 오체투지하듯 써 내려간,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펼쳐지는 질박한 시의 향연이다. ‘몽해항로’라는 제목은 일본 여행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책에서 따온 것으로, ‘흑해(黑海)’를 향해 가는 길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흑해는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며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흑해는 죽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그 흑해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항로는 안개와 파도와 폭풍이 몰아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이지만, 그는 이 시집에서 소멸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상의 순간들을 기록하였다. 
‘장석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책’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다독가이자 북멘토, ‘서고(書庫) 속의 수도승’이라 불리는 그에게 책은 곧 밥이다. 세끼 밥을 챙겨 먹듯 그는 마음의 끼니로 책을 먹고, 읽고, 써 왔다. 장서가 3만여 권에 달하고 하루 여덟 시간씩 책을 읽으며, 그간 펴낸 책만 해도 시, 소설, 에세이, 평론 등 60권 가까이 된다. 그런 그가 으뜸으로 꼽는 책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다. ‘절대자유’와 ‘무위자연’을 실천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바쁜 도시인으로 살았던 시인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느림’과 ‘비움’의 삶을 찾아 안성으로 내려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낮음을 지키며 산다’라는 뜻의 ‘수졸재(守拙齋)’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깨달은 인생에 대한 관조와 여유가 담긴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잘 우려낸 좋은 차를 마시는 것처럼 깊은 차향이 느껴진다.
이 시집은 대부분 짧은 시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시는 한 줄이다.”라고 자서에서 밝혔듯이, 그는 일체의 장식과 모호함을 배제한 최소의 언어로 시를 쓰고 싶어 시집을 묶는 지난 3년간 한국의 시조와 일본의 하이쿠를 공부했다고 한다.
“이 시집에서 말하려는 건, 살아 있음입니다. 우리 생을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찰나적으로 생성, 소멸하는 것인데,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 것, 그게 삶이겠죠.”
투명한 마음의 눈을 뜨고 완전히 100퍼센트로 살아 있음을 느끼라고 말하는 그는, 시를 쓰는 것을 넘어, 시를 산다. “자벌레”가 사각사각 “뽕잎 경(經)”을 먹고 살듯, 시를 쓰고, 시를 행하며, 시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은 시인의 말처럼 “못내 긴 세월 시인이었고 더 긴 세월 시인일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김소연]

장석주
출간일 2010년 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