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들은   (다양한 모습의) 사탄, 옆집, (여러 가지 형태의) 섹스, 민달팽이
친구들은 하느님, 우리 집 강아지, 샬럿 브론테의 소설들, 민달팽이 퇴치용 알약

지넷의 어머니는 ‘적들의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지넷을 입양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진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의 라이벌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반면 교회에 다니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거나 정욕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다. 처음에 어머니의 친구였던 지넷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자신이 자라온 세상의 적이 된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을 적으로 내모는 세상과 싸우며 독립적인 인간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한 소녀의 성장기다. ‘오렌지만이 과일’인 줄 알았던 한 어린 소녀가 오렌지 외의 세상, 더 큰 세상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적들 덕분이었다. 이 책은 현대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지넷 윈터슨의 자전 소설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칭하고, 가장 존경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바로 나”라고 대답했다는, 부러울 정도로 당당한 지넷 윈터슨 앞에 놓인 적은 무엇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편집자의 적은 무엇일까? 손가락을 베서 피를 보게 하는 날 선 교정지, 자칫 커피라도 쏟으면 번져 버리는 수성 펜, 내 마음대로 회사 창고를 털 수도 없는데 공짜로 책 좀 달라고 졸라 대면서 리뷰 한 줄 써 주지 않는 야속한 친구, 그리고 적 중에서도 가장 큰 적이라면 단연, 다크서클이 턱으로 내려올 때까지 세 번 네 번 들여다본 원고인데도 귀신에 씐 것처럼 놓쳐 버린 오탈자가 아닐까?

[민음사 편집부 박경리]

 

  1. 이현주
    2017.8.20 8: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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