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뒤로

프랑스에 귀화한 이탈리아인 토목기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가 프로방스 지역에서 수도관 건설 일을 맡게 되면서 가족이 엑상프로방스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에 가난을 딛고 학업을 이어 가면서, 훗날 화가가 되는 폴 세잔을 비롯한 친구들과 교류했다. 열아홉 살에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온 졸라는 출판사에 이어 기자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초기 작품들 중 대표작인 『테레즈 라캥』(1867)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썩은 문학” “포르노 같은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파헤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고 있다. 이후 졸라는 『루공 가의운명』(1871)부터 『파스칼 박사』(1893)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년에 걸쳐 스무 권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그중 일곱 번째 책으로 1876년부터 신문에 연재되다 이듬해 책으로 출간된 『아소무아르(목로주점)』(1877)는 큰 논란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었고(정확히 말하자면, 하층민의 삶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불러온 그 논란은 오히려 작품의 성공에 기여했다.), 그 덕분에 졸라가 매입한 파리 근교 메당의 집은 정기적으로 그곳에 모인 작가들의 작품집 『메당의 저녁』(1880)과 함께 자연주의 문학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1893년 루공 마카르 총서를 막 마무리한 오십 대 졸라의 삶은 프랑스 사회를 첨예한 갈등과 대결로 밀어 넣은 드레퓌스 사건(1894~1899년)과 함께 큰 전기를 맞게 된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며 『로로르』지에 기고한 「나는 고발한다」(1898)로 인해 졸라는 프랑스 극우파들에게 비난과 협박을 받았고, 결국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해 재판을 받아야 했다.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드레퓌스의 무혐의가 확정된 뒤 귀국했지만, 그런 뒤에도 수그러들지 않은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그가 1902년 파리 아파트에서 벽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심지어 누군가 자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드레퓌스 논쟁 이전에도 이미 열아홉 번이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후보했지만 ‘외설 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번번이 실패한 에밀 졸라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슬픔에 빠트렸고, 그의 장례식에는 광부들이 자신들을 문학의 주인공으로 삼아 준 작품의 제목 “제르미날!”을 외치며 행진하기도 했다.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힌 그의 유해는 1908년 팡테옹으로 이장되었고, 메당의 집은 현재 졸라 박물관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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