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니는 빈의 부르주아 유대인의 셋째로 태어났다. 열아홉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재산은 모두 바닥나버려 개인 교사 자리를 얻어서 생활고를 이겨내야 했다. 열여섯에 사회주의 학생 조직에 참여하는데, 이 조직은 사회민주당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뒤 진보적인 학생 서클에 참여하며 꾸준히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꿈꾸었고 스물여섯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 숙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잠시 일한다. 그러나 정말 도움이 필요한 고객들은 돈을 낼 수 없었고 돈이 있는 자들은 변호해줄 만한 자들이 못 된다고 생각한 그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연구 활동에 들어간 그는 국제 문제 전문가로서 <오스트리아 경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파시즘의 발흥으로 비공식적인 자체 검열이 강제되자 영국으로 이주한다. 영국에서는 연구 집단을 조직하고 교육 자료를 준비하며 기독교 좌파 운동의 정책적 입장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
다시 미국으로 이주한 폴라니는 1947년부터 6년간 컬럼비아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일반 경제사를 강의한다. 퇴임 후에도 경제 성장의 제도적 측면들에 대해 꾸준히 학제적 연구를 해나간 그는, 평생 동안 시장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과학을 무기로 택한 예언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평생 고민했던 것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그가 귀 기울이고 기꺼이 나누어 지려 했던 이웃의 고통은 단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론적 틀은,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데서 오는 모든 종류의 절규와 신음을 포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깊숙한 영적 차원을 짚어내는 예언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주요 저작으로 <거대한 변형>, <초기 제국의 교역과 시장>, <오늘의 유럽>, <기독교와 경제 생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