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팝니다」 조선판!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환상을 주제로 보내드리는 열 번째 편지입니다. 오랜만에 조선 시대로 날아가 볼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들기는 어려운 법. 옛사람들이 환상을 팔면서 먹고살았던 이야기를 들고왔어요. 조선 사람들의 직업 분류 체계인 사농공상에서 ‘공상’에 해당하는 직업 가운데 전기수와 환술사입니다.
“종로 담배 가게에서 소설 듣던 사람이 영웅이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로 소설책 읽어 주는 사람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 『정조실록』 14년(1790) 8월 10일
18세기 조선은 소설에 빠졌다. 임금이 사는 궁궐에서 촌구석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당시 서울에는 열다섯 곳에 이르는 책 대여점, 즉 세책점(貰冊店)이 성업했다.
세책점은 장편 소설을 여러 권으로 나눠 손님이 연거푸 빌리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나머지 세책점을 들락거리다가 빚을 내는 데 이르렀다. 여인들은 비녀와 반지를 담보로 맡기고 소설을 빌렸다. 이덕무는 “이야기책을 탐독하여 가사를 방치하거나 여자가 할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터. 그런데 돈을 주고 빌려 보는 등 거기에 취미를 붙여 가산을 탕진하는 자까지 있다.”라고 우려했다. 사회적 문제로 보일 정도로 너나없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다.
세책점은 글을 알고 여유 있는 사람이 이용했다. 일반 백성이 들락거리기는 쉽지 않았다. 책값도 비쌌고 문맹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맞춰 소설책 읽어 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생겼다. 이들은 전기수(傳奇叟)라고 불렸다.
전기수는 소설 낭독 전문가였다. 전기수는 억양을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청중이 소설책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워낙 실감 나게 낭독했던 탓에 전기수가 목숨을 잃는 일도 일어났다. 정조가 언급한 1790년의 살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종로 담배 가게 살인 사건은 전기수가 『임경업전(林慶業傳)』을 낭독하다가 일어났다. 간신 김자점이 누명을 씌워 임경업 장군을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칼로 전기수를 찔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칼을 휘두르며 전기수에게 소리쳤다. “네가 김자점이렷다!” 낭독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전기수를 『임경업전』 속 김자점으로 여겼던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담배 가게 모습에서 왼쪽 아래 소설을 낭독하고 있는 전기수가 보인다.
전기수는 저잣거리에 좌판을 깔거나 담배 가게 한쪽에서 목청 좋게 소설책을 낭독했다. 전기수가 소설책을 펼치면 누구나 원하는 시간만큼 들었다. 표를 받지도 않았고 좌석이 지정되지도 않았다. 멀찍이서 듣고 떠나도 그만이었다. 전기수의 낭독은 말 그대로 공짜였다.
우리 속담에 “공짜면 양잿물도 큰 잔으로 먹는다.”라고 했다. 이토록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기수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조수삼은 『추재집』에 전기수가 돈을 버는 비법을 써 놓았다. 『추재집』 속 전기수는 고전 소설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을 낭독하며 요전법(邀錢法, 돈 얻는 법)이라는 기술을 썼다. 전기수가 요전법을 쓰면 청중은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수삼은 요전법을 두고 묘한 기술이라고 평했다.
요전법의 핵심은 침묵에 있다. 심청과 심봉사가 다시 만날 때, 이몽룡과 춘향이 옷고름을 풀 때처럼 다음이 몹시 궁금한 대목에서 전기수는 돌연 침묵했다. 청중은 몹시 답답했을 터, 앞다투어 돈을 던졌다. 전기수는 돈이 웬만큼 쌓였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목청을 돋우며 다시 맛깔난 낭독을 선뵈었다. 이를 두고 조수삼은 “말을 많이 하되 잠깐잠깐 침묵하는 게 돈 던지게 하는 비법, 묘리는 사람들이 빨리빨리 듣고 싶어 하는 대목에 있다네.”라고 평했다.
일정한 금액을 받으며 부유층을 상대한 전기수도 있다. 고전 소설 『요로원야화기』 속 전기수 김호주(金戶主)는 부유한 집안을 드나들며 낭독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 덕에 김호주는 집을 살 만큼 돈을 벌었다. 그의 낭독은 듣는 이가 돈을 아끼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영조 때 무관 구수훈(具樹勳)이 지은 『이순록(二旬錄)』 속 전기수는 용모가 고왔다. 한번 들으면 다시 찾지 않고 못 배길 만큼 낭독 솜씨도 빼어났다. 고운 용모에 혼을 쏙 빼 놓는 낭독 솜씨 덕분에 그는 대감집 안방마님들 사이에 이른바 잘나가는 유명인이 되었다. 이 전기수는 곱상한 외모에 맞춰 여장을 하고 양반집 안방을 들락거렸다. 안방마님 여럿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던 그는 포도대장 장붕익(張鵬翼)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소설을 암송하는 전기수도 있었다. 이들은 중국 소설 번역본을 암송해 청중을 사로잡았다. 조선 후기 문인 유경종(柳慶種)은 『해암고(海巖稿)』에서 전기수의 『서유기』 암송을 듣고 표현력과 암기력에 감탄했던 일을 썼다. 유경종이 만난 전기수는 한자어와 한글을 적당히 섞어 가며 『서유기』를 암송했다.
소설책 한 권은 전기수를 통해 열 사람, 백 사람 귀로 들어갔다. 조선 시대 저잣거리를 오가던 남녀노소는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분노했다. 전기수는 예능인이었고 지식의 전달자였으며 공론장의 구심점이었다.
신라 시대 입호무를 묘사한 그림
“주머니를 열고는 더듬어 보게 했으므로 손을 넣어 더듬었습니다. 그랬더니 동전 다섯 닢만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맨손으로 그 주머니를 열고 움켜 낸 동전이 쉰 닢에 가까웠습니다. 그 돈을 다시 거두어 주머니에 넣게 한 뒤 사람을 시켜 다시 더듬게 했더니 또 다섯 닢만 있었습니다.” ─ 『영조실록』 39년(1763) 1월 30일
12세기 일본에서 출간된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는 당나라 시절 유행한 공연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신라 공연도 나온다. 항아리에 들어가 춤을 추는 ‘입호무(入壺舞)’다. 단순한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탁자 두 개, 항아리도 두 개지만 무희는 한 명이다. 무희는 이쪽 탁자에 놓인 항아리로 들어가 저쪽 탁자에 놓인 항아리로 나온다. 신라 입호무는 요즘 마술사가 선뵈는 공간 이동 마술의 원조다.
조선에서는 마술을 환술(幻術), 마술 공연을 환희(幻戲), 마술사를 환술사(幻術士)라 일컬었다. 환술사는 여러 장치와 숙달된 손놀림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눈앞에 선보여 관중을 현혹하고 놀라게 했다.
환희는 진귀한 공연이었으나 남을 속이고 놀래는 좋지 않은 재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통념 때문에 유학자는 환희를 멀리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신라, 고려를 거치며 꽃핀 환술은 조선에 이르러 쇠퇴했다.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李孟賢)은 성종(成宗)이 중국 사신을 따라온 환술사의 환희를 즐기자 보지 말 것을 청했다. 허균(許筠)의 형 허봉(許篈)은 연행을 가서 중국의 환술 공연을 보고 부정적 인상을 받았다. “오늘 잡희(雜戲)를 벌인 사람은 패옥(佩玉)을 꺼내기도 하고 빈 그릇 가득 꽃을 피우기도 했으니 이는 필시 환술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혹되어 그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했으니 불교의 거짓을 간파한 당나라 사람 부혁(傅奕)에게 부끄럽다.”
16세기 실존 인물 전우치(田禹治)도 유명한 환술사였다. 조선 후기 문인 홍만종(洪萬鍾)은 전우치를 우리나라 도맥(道脈)을 잇는 도사로 꼽아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실었지만, 다른 문인들은 그를 환술사로 여겼다. 『어우야담』을 남긴 유몽인은 전우치를 진짜 도사에 미치지 못하는 환술사로 기록했다.
전우치는 다양한 환술을 구사했다. 아무런 도구 없이 밧줄을 세워 하늘나라 복숭아를 따 왔고, 밥알을 불어 많은 나비를 만들어 날렸다. 밧줄을 타고 올라간 아이가 땅에 떨어지자 사지를 다시 맞춰 걷게 하는 환술도 선보였다. 전우치가 보여 준 환술은 요즘 마술사가 부채로 부쳐 손바닥에서 작은 종이를 무수히 날리는 마술, 사람을 자르고 다시 붙이는 인체 절단 마술과 비슷하다.
부정적 통념 때문에 많은 환술사가 음지로 숨어들었다. 음지에 들어간 환술사는 환술을 이용해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문인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나오는 환술사는 거지꼴을 하고 다녔으나 환술을 써서 진탕 먹고 마셨다. 그는 기방에 들어가 소매에서 돈을 줄줄이 꺼냈다. 돈을 본 기녀가 술상을 잘 차려 내오자 거지 환술사는 신나게 먹고 마셨다. 먹을 만큼 먹은 거지 환술사는 최면술로 기생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뒤 유유히 떠났다. 입이나 소매에서 물건을 계속 꺼내거나 최면술을 이용한 마술은 요즘도 볼 수 있다. 거지 환술사 입장에서 본다면 환희를 보여 주고 그 값으로 술을 뺏어 먹은 셈이었다.
환술은 공연으로 정착하며 남사당패 공연의 한 꼭지로 자리매김했다. 남사당패 공연에서 각 연희의 선임자를 ‘뜬쇠’라 부르는데 열네 명 내외의 뜬쇠 가운데 ‘얼른쇠’가 있다. 얼른쇠가 바로 환술사다. 얼른쇠 공연은 일실되어 전모는 알 수 없다. 우리말 가운데 ‘얼른번쩍’은 빠르게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일컫는다. 얼른쇠는 아마도 물건을 순간적으로 보였다 없앴다 하는 환술을 선보였을 법하다. 전문 예능 집단의 선임 환술사였으니 얼른쇠는 『금계필담』의 거지 환술사와 『어우야담』의 전우치가 선보인 환술 역시 어렵지 않게 부렸을 것이다.
불가능할 듯한 일을 눈앞에 보이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환술사와 차력사는 닮은꼴이었다. 차력사 역시 환술사처럼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볼거리로 밥벌이를 했다. 조수삼의 『추재집』에 나오는 ‘돌 깨는 사람’도 그중 하나다. 돌 깨는 사람은 석공이 아니라 차력사다. 그는 구경꾼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웬만큼 모였다 싶으면 팔뚝 굵기의 차돌을 깼다. 단단한 차돌을 맨손으로 깨는데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다. 의심 많은 사람이 도끼로 내리쳐 보았지만 차돌은 멀쩡했다. 구경꾼은 이 차력사를 두고 신선술을 익히는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환술사와 차력사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놀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었다. 조선은 예의와 범절을 중시하는 엄숙한 나라였지만 엄숙한 조선의 백성은 환술사와 차력사 덕분에 가끔 왁자지껄 놀라고 웃을 수 있었다.
─ 강문종·김동건·장유승·홍현성,
『조선잡사』 117~125쪽 중에서
『임경업전』 낭독 중에 전기수를 찌른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해요.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라는 묘사를 보면 광인의 행동이었던 것 같은데요. 『거리의 이야기꾼 전기수』라는 책에 따르면 이때 청중들은 지금 상황도 요전법을 위한 연출인가 해서 돈을 던졌다는 거예요. 《한편》 환상 편의 탐구 주제인 환상의 마력, 이야기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신라 시대 입호무의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매에 넋을 놓았어요! 현대 이전의 사람들이라면 왠지 고통에 찌든 엄숙한 얼굴로만 상상하게 되는데, 놀라운 게 보고 싶고 재밌는 걸 좋아하는 마음은 지금과 다를 바 없네요. 전기수의 ‘요전법’은 콘텐츠 마케팅의 핵심으로 보이기도 해요. “말을 많이 하되 잠깐잠깐 침묵하는 게 돈 던지게 하는 비법, 묘리는 사람들이 빨리빨리 듣고 싶어 하는 대목에 있다네.” 편집자가 매번 책 소개글을 쓸 때의 고민과도 같고요.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멋진 책인지 되도록 많이 말하되, 어디에서 멈추고 여운을 두어야 더 많은 독자님들께 닿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
‘조선 좀비물’로 인기를 끌었던 화제의 드라마 <킹덤>에서 주인공 세자 못지않은 무술 기량을 뽐냈던 ‘영신’. 그의 직업은 착호갑사(捉虎甲士)였다. 산속에서 목숨 걸고 호랑이를 잡는 특수 부대 출신이었으니, 쉴 새 없이 좀비를 처치하는 실력이 납득되는 설정이었다. 이처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직업을 총망라한 책이 신간 『조선잡사』다. 젊은 한국학 연구자들이 발굴한 67가지의 직업은 ‘이런 일도 있었다니?’ 하는 놀라움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조선 하면 떠올리는 선비나 농사꾼이 아니라 시장, 뒷골목, 술집, 때로는 국경에서 바닷속까지 오가며 치열하게 먹고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