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논문으로 책 만들기

 

 

연구를 출판하는 사람들
“개강 첫 주 잘 보내셨나요?” 요즘 업무 메일에 꼭 적어 보내는 인사예요. 학계 밖 전문가, 활동가, 작가 등 여러 분야의 필진이 참여하는 《한편》이지만, 인문사회 분야 편집자인 저는 아무래도 대학 소속 연구자 분들과 가장 많이 작업을 하게 된답니다.
지난 주 열린 《한편》 3주년 기념 웹세미나는 첫 호와 최신 호의 필진과 이러한 ‘연구를 출판하는 일’을 폭넓게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연구를 출판하는 일’의 내용에 연구뿐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삶이 포함된다면, 형식은 논문·잡지·단행본 등으로 다양합니다. 《한편》 10호와 비슷한 시기 출간된 『한국에서 박사하기』(스리체어스, 2022)의 담당 편집자도 자리해 연구자와의 협업 경험을 나누어 주었어요. 350명에 가까운 긴 신청자 목록을 보며 연구와 출판, 두 현장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온라인으로 참여해 주신 신현아 연구자와 랜선 라운드 테이블을!
전문 지식을 쓰고 번역하고 편집하는 연구자와 편집자의 만남
처음으로 교양 강의를 받아 강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벅차고 기뻤는지를 떠올려 본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니 장하다며 친구들과 가족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그것이 6개월짜리 계약직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다 같이 기뻐할 수 있었을까.* 그 삶의 시작을 알려 준 것은 대학의 취업 지원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신현아 씨, 졸업하신 지 좀 되었는데 아직 취업 안하셨나요?”
“네? 저는 지금 바로 이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강의 노동은 그 대가가 철저히 ‘강의 시간’만을 노동 시간으로 계산하여 시급으로 책정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이 아닌’ 일들이 따라붙는다. 새로운 강의를 개발해도 개발에 들어간 시간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개발한 강의는 정규직 교수의 것이 되며 강사 배정 역시 정규직 교수의 권한이다. 강사는 강의를 만들고 연구하고 실행하지만 그 강의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수강생들의 과제와 시험 채점도 강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기에 당연히 시급에 산정되지 않는다. 그 외에 학술대회를 열고 장소를 대여하고 학회지를 편집하고 논문을 수합하고 심사위원을 섭외하는 등 ‘학계’를 움직이기 위한 수많은 일들 또한 노동이 아니었다.
나는 몇 명의 정규직과 수많은 비정규직 및 하청노동자들이 벌처럼 움직여 유지되는 이 대학이 어떤 곳인지 새로이 깨달았다. 대학이 매혹적인 공간이라고 여겼던 것은 나의 착각이자 짝사랑이었다. 노동자로서 다시 마주한 대학은 잔인한 공간이었다.
— 신현아, 「대학이 해방구가 될 때」,
《한편》 10호 중에서
* 2019년에 강사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대학 시간강사는 학기마다 신규 계약을 맺는 6개월 계약직이었다. 강사법은 1년 계약직이되 해고 사유가 없는 한 2회까지 연장하게 했지만, 대학은 계약 기간 내에 강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무급 상태인 강사가 스스로 사직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 법 시행의 실제 효과는 미미하다.
첫 번째 시간의 패널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신현아 연구자는 「대학이 해방구가 될 때」라는 글로 ‘대학’ 호의 허리를 튼튼히 세워 주셨죠. 《한편》 편집진과의 협업이 어떠셨는지를 여쭈니, 선생님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쉽지 않았다’는 말씀을 풀어 주셨답니다.
일반적인 글 청탁이 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오마카세’ 주문이라면 《한편》은 더 많은 것을 요청한다‘는 점을 짚어 주신 대목이 좋았는데요. 편집진이 기획 단계에서 필자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집필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의견을 주고 받으며 개고를 거친다는 생생한 증언이었습니다. 원고를 고치는 과정이 필자와 편집자 모두에게 부담 가는 일임에도 《한편》은 최종 마감 직전까지 글감과 표현 등을 상의하는 편입니다. 물론 모든 원고에 해당하는 일은 아니고, 개고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요. 가슴이 철렁한 한편 필자의 솔직함에 감사하게 되는 한마디였는데, 알쏭달쏭 편집자님은 어떠셨나요?
제가 청탁한 필자에게 ‘청탁을 받고 초고를 쓰고 피드백을 받고 개고하고 또…… 원고를 완성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진지하게 물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연구를 출판하는 일’을 하며 겪은 시행착오들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좋은 질문을 던지는 글, 주장과 목소리가 선명한 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질문이나 의견 전달 방식이 뭘지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 보고, 저자와 편집자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세상과 멀어지지 않는 연구를 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독자 질문에 대해 들려주신 이야기도 기억나네요. 신현아 연구자의 답변은 “자신의 연구 주제, 연구 대상의 ‘현장’과 연결되어 있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것이었죠. 평소 선생님이 대학뿐 아니라 대학 바깥의 투쟁 현장과도 연대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묻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연구자님의 답변을 들으며 그 경험과 관점, 태도가 녹아든 또 다른 글을 얼른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는 의지가 차올랐어요.
저 역시 말에서나 글에서나 연구자만의 독특한 관점을 접할 때 한 번 더 원고를 볼 힘을 얻는 편입니다. 학술지 논문은 보통 연구자의 자아가 제거된 형식인데, 저는 그런 ‘객관적인’ 글을 한 번 더 필자의 생각 상자에 넣고 흔들어 주길 부탁드리고 있어요. 편집이 아니라 협상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요?
2, 3부에서는 그러한 협상의 연속인 비문학 출판 일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좁고 깊음’을 추구하는 전문가인 연구자와 ‘넓고 얕게’ 두루 보는 제너럴리스트인 편집자가 무엇을 얼마나 설명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게 되는데요. 이런 서로 다른 지향점에 대해 북저널리즘의 김혜림 에디터와 한편 ‘세대’ 호에 「”20대 남자” 문제」를 실은 이우창 연구자가 소중한 경험담을 풀어 주었어요.
아아, 두 분과 함께한 2부는 무척 빠르게 지나갔죠. 한편 편집부가 겪는 저자와의 아슬아슬한 협업을 역시 현장에서 겪고 있는 김혜림 에디터님과 『한국에서 박사하기』 필진 간의 신뢰가 기억에 남아요. 대학원생들의 현실 문제를 다루는 『한국에서 박사하기』라는 책을 대학 밖으로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연구자와 매개자인 편집자 각자 할 역할이 있다는 신뢰가 협업의 출발이었다는데요.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통 ‘학술서’와 ‘대중서’가 나뉜다고 여기지만, 깊이냐 시의성이냐는 학술서 안에도, 대중서 안에도 존재하는 두 방향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데에는 여러 시선이 필요한 것이구요. 인문잡지 한편의 5호, 10호 특별부록인 『책 만드는 일』과 『공부하는 일』 또한 그 사이에서 진동한 기록이죠!
균형을 맞추는 일의 중요함……. 정녕 쉽고 빠른 길은 없는 걸까요. 『공부하는 일』에 수록된 남수빈 연구자의 말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네요. “내 노동의 결과물을 그 화장실의 빛나는 타일에 견줄 수 있는가,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자문하고, 그것을 최소한의 직업윤리로 삼으려고 해요.” 논문에서 잡지의 한 꼭지로, 잡지에서 단행본 한 권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순간 반짝이는 때가 있겠지요?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