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책을 왜 읽을까?

 

 

사서에서 도서관장까지 된 작가의 책 예찬
대학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헐레벌떡 들어갔던 강의실, 수업은 제쳐두고 막걸리에 취하던 잔디밭, 옹기종기 모여서 밤새 떠들던 동아리방…… 추억이 서린 장소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학교 중앙에 있었던 도서관이 생각나요.
어떤 책을 찾으러 좁은 책장 사이를 걷고 있으면 그 주제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확장됐어요. 어차피 읽지도 못할 책들을 괜히 한번 펼쳐 보거나 책등을 만져 보면서 마치 책 속의 지식을 얻은 것처럼 고양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지금 여전히 저는 공부 혹은 지식이라고 하면 책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오늘은 책 그리고 도서관 하면 곧장 떠오르는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 봐요.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시리즈 중 하나인 『말하는 보르헤스』는 보르헤스가 1977년과 1978년 대학에서 했던 강연들을 묶은 책인데요. 보르헤스는 자신을 매료시킨 열두 가지의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중 하나는 물론 ‘책’입니다. 
정말 많은 작가들이 책에 대해 너무나 멋지게 썼습니다. 나는 그중 몇 사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선 책에 대해 에세이 한 편을 바친 몽테뉴를 언급하겠습니다. 그의 에세이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즐거움이 없는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몽테뉴는 필독이 잘못된 개념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책을 읽다가 힘든 대목을 만나면 거기서 멈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즐겁기 위해 독서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설문이 실시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 여동생 노라는 이 설문에, 미술이란 색과 형태로 기쁨을 주는 예술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문학 역시 기쁨의 형식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을 때 그것이 힘들게 생각된다면 이는 작가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나는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는 본질적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은 읽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도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몽테뉴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를 인용하면서, 자기는 『아이네이스』보다 『농경 시』를 더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이네이스』를 더 좋아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몽테뉴는 책에 관해 열정적으로 말하면서, 책은 행복을 주지만 그것은 뭔가 께느른한 쾌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작업을 남긴 에머슨은 이와 상반된 말을 합니다. 어느 강연에서 에머슨은 도서관을 두고 마법의 방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방에는 인류 최고의 영혼들이 마법에 걸린 채로 갇혀 있으며, 벙어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 영혼들은 우리가 책을 펼쳐야만 깨어납니다. 인류가 탄생시킨 최고의 인물들에게 기댈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찾지 않은 채 그들에 관한 논평이나 비평을 읽는 것을 선호할 뿐, 그들이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의 인문 대학에서 20년 동안 영국 문학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참고 문헌은 조금만 찾고, 비평도 읽지 말고, 직접 책을 읽으라고, 그러면 아마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항상 쾌감을 느끼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작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억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목소리, 즉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목소리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인생의 일부를 문학에 바쳤고, 독서를 행복의 형태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독서만큼은 아니더라도 또 하나 행복한 것이 있다면 시 창작, 그러니까 우리가 창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창작은 우리가 읽었던 것을 망각하고 기억하면서 만들어지는 혼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이 쓰인 날부터 우리가 읽는 날까지 흘러간 모든 시간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지속적으로 예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책이 오탈자로 가득할 수도 있고, 우리가 작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도 성스러움이나 신성함이 담겨 있습니다. 미신을 맹신하듯무조건적으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발견하고 지혜를 발견하려는 욕망을 예찬해야 합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말하는 보르헤스』, 「책」 중에서
앗, 지난 주말에 동네 도서관에 다녀왔는데 통했네요. ‘대학’ 호를 마감하면서 교정은 그만…… 나도 교정된 글을 읽고 싶다…… 하면서 다녀왔거든요.
대학 시절에는 도서관에 들어갈 때 어지러움을 느꼈어요. 책이 너무 많아서요. 책 한 권을 펼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번 읽고 백번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라 서가가 부담스럽더라구요. 늘 책들을 흘겨보면서 조바심 내던 기억이 나네요. 왜 그랬는지…….
‘대학’ 호에서 신기했던 건 배우는 일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정신이었어요. 배우는 건 힘들지만 보람 있지, 배우는 건 재미있지만 힘들어 하는 식으로 나만 꼬아서 생각했나 싶은 거예요. “책은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도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보르헤스의 말도 이렇게 단언하다니 싶은데…… 일요일에 도서관에서 궁금한 분야 책들을 마음대로 꺼내다 쌓아 놓고 대충 보자니 과연 쾌감이 있더라구요. 하지만 책에 손대지 않는 시절의 카오리 이야기도 떠오른단 말이죠.
나는 어쩐지 텅 비어 있어서, 밖에서부터 이야기를 주입하고 흡수해서 될 수 있으면 내용물을 채워 나가고 싶다. 거듭 되뇌이지만 최근에 책을 읽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냐, 내 안의 각오가 부족해, 잘 몰라도 지금은 아냐, 이런 느낌으로 책장을 멀리한 채 시간이 흐르고 말았는데 사실 책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이 최근 들어 부족해진 것이 아닐까? 그건 손에 책을 들기만 하면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일까?
나라는 생명체가 약해져 있다.
남자와 곧 섹스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 안에 타인이 들어오다니…… 예전에는 이런 것에 굉장한 혐오감과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행위에 자신을 연착륙시키기 위해 허둥지둥하는 것 같다.
어설프고 웃긴 첫경험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고 난 뒤에 매우 후회할 것만 같은…… 혹은 자신을 상처 입히기 위해서 하는 것만 같은 느낌?
이것은 내가 계속 ‘젊은 날의 실수’와 같은 진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일까? 요즘 책을 읽지 않아서 진부함에 익숙해진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은 거지만 정말 그렇다. 한번 되돌아보자. ‘보통 대학생’처럼 굴고 싶은데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진부하니 재미있는 캐릭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매일 지루하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사실은 모두 그 ‘보통 대학생’ 이미지에 포섭되어 버려서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보니, 그로부터 탈출할 수단이 더더욱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돌파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창작의 범주일 테니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게는 창작의 재능이 없다.
― 마이조 오타로, 정민재 옮김,
『인간의 제로는 뼈』 139~140쪽 중에서
“최근에 책을 읽지 않았다. 나라는 생명체가 약해져 있다.” 책이 싫은 시기가 어찌저찌 지나가고 뒤늦게 『인간의 제로는 뼈』를 읽다가, 카오리의 이 말에 잠깐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어요. 너무 공감이 되는 이야기를 만난 벅참에 잠시 쉬어 가자는 마음으로요. 사실 보르헤스의 책을 읽는 데에 큰 노력이 들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보면서, 요새 저는 보르헤스가 했다는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어요. “읽기는 쓰기 후에 일어나는 행위이다. 보다 체념적이고, 보다 문화적이고, 보다 지적인 행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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