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보고 보인다는 감각

 

 

다른 감각의 세계에서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들 새해 첫날을 어디서 어떻게 맞이하셨나요? 항구 도시 출신인 저는 거의 대부분의 1월 1일을 외가댁 근처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보며 시작했네요. 그래서인지 SNS의 ‘n년 전 오늘’에는 비슷한 배경에 해가 동그랗게 잘 걸린 사진, 해는 구름에 가렸지만 뭐든 한 장 남기려 흐릿한 바다가 주인공이 된 사진, 해를 보러 갔는지 사람을 보러 갔는지 알 수 없는 풍경 사진이 순서를 바꿔가며 뜨곤 한답니다.
새해를 맞이한 편집부에서는 다음 호 ‘대학’ 편 편집에 여념이 없는데요. 10호로 나아가기 전 지난 ‘외모’ 편을 다시 펼치며 시각 중심 문화에 반격을 가하는 에세이 『거기 눈을 심어라』을 소개해드리려 해요.
《뉴욕 타임스》, 《오프라 매거진》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작가이자 공연예술가, 또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저자 고댕은 문학, 철학, 대중문화에서 시각장애가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는지를 두루 살핍니다. 비장애인인 대다수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경험을 컴컴한 어둠 속에 있다든지, 시각 대신 다른 감각을 활용해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인기 해외 드라마 「왕좌의 게임」, 재작년 가을 리메이크된 SF 영화 《듄》을 보신 분이 계실까요?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원작으로 하는 「왕좌의 게임」 속 인물 아리아 스타크는 암살단의 계율을 깬 벌로 시력을 잃습니다. 이후 시험의 과정을 거치며 그는 눈 이외의 감각 기관을 사용하는 능력을 얻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에 스스로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는 감각은 인물의 각성과 상징적으로 얽힙니다. (소설 『듄』의 중요 인물도 후속편에서 비슷한 시련을 경험합니다.)
고댕은 오래된 문학 작품과 최근의 대중 문화에서 ‘앞을 못 보는 장님 예언자가 하나의 클리셰’로 등장함을 지적하면서, 이런 클리셰가 눈먼 사람을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주 간단한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두 극단적인 이미지로 고착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체로 그들은 자신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위대한 눈먼 음유시인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동안에도, 맹인은 앞을 보는 주인공의 조력자나 조수라는 관념이 빚어진다.“라는 점을 짚어 내지요.
어릴 때 처음 「스타 워즈」 시리즈를 보던 무렵 내 시력은 정상이었다. 핼러윈 때는 레아 공주 옷을 입고 그녀를 닮은 얼굴로 제법 관심을 끌기도 했고, 보이기보다는 느껴지는 힘인 포스에 매료되었던 기억도 있다. 눈가리개를 한 광선검 훈련부터 마지막의 짜릿했던 데스 스타의 폭발까지, 루크 스카이워크는 앞을 보지 못할 때도 잘 해냈다. 오비완 케노비의 말처럼 “눈은 널 속일 수 있다. 눈을 믿지 마라.”
어쩌면 그래서일까? 「스타 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감독 라이언 존슨이 루크를 맹인으로 만들려고 생각했던 것도 놀랍지는 않다. 그는 2017년 《롤링 스톤》의 커버스토리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약 루크가 시각 장애인이라면? 만약 루크가 이를테면, 눈먼 사무라이라면?” 그는 그때가 「로그 원」에서 눈먼 전사 치루트가 등장하기 전이었다고 덧붙인다. (……)
세월이 흐르면서 시와 예언을 통한 보상의 개념은 슈퍼 히어로의 영역으로 옮아갔고, 여기서 시각장애인의 나머지 감각은 비시각장애인의 감각을 훨씬 뛰어넘는 기이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갖는다. 따라서 대중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모두 초능력에 관한 것이지만,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측면은 잊힌다. 클리지가 주장하듯, 비시각장애인의 낮은 기대를 어느 뛰어난(그들이 이해하기로는) 시각장애인이 뛰어넘을 때, “그들은 보상적 능력, 초감각적 인지력에 관한 오랜 신화를 재발명할 수밖에 없다. 육감, 제2의 시각, 세 번째 눈 등이 그러하다. 우리는 매우 정확한 청력과 절대 음감, 더 많고 더 정확한 미뢰, 더 예리한 촉각, 블러드하운드의 후각을 모두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나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정말 자주 듣는다. “당신은 후각이 굉장히 좋겠죠.” “청력이 정말 뛰어나시네요.” “내 얼굴 만지고 싶어요?” 반대로 내 직업이 무언지 묻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래서 가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열중한 주인으로부터 마침내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강아지처럼 지나치게 흥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작가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단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시각장애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비꼬는 식이라기보다는 “멋진데요! 시각장애인이 글을 쓴다니 정말 훌륭해요.” 하는 식이며 그다음에는 종종 팔 위쪽을 툭툭 친다.
― M. 리오나 고댕, 『거기 눈을 심어라』, 오은숙 옮김, 
「낙인과 초능력 사이의 진퇴양난」 중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저자의 팔 위쪽을 툭툭치며 대화를 시도합니다. 저자가 전하는 또 다른 일화는 앞이 안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내 얼굴을 만져보라’는 제안 혹은 원치 않은 호의를 겪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한 오페라 가수는 음악회가 끝난 후 한 관객이 자신의 의사는 다 듣지도 않은 채 “대화의 상대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을 만져보고 싶지 않냐”며 자신의 손을 가져다 얼굴에 부비는 일을 겪습니다. 어떤 비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촉각으로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발상인 듯합니다. 그는 “정말이지, 그 만남에서 기억나는 거라곤 아주 긴 코밖에” 없었다며 저자에게 말합니다. “내 손을 자기 얼굴에 가져가서는 그게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다니 우스웠어요.”
레터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소설,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에서 영험한 예언가나 요리나 무술, 예술 같은 특정 분야의 정점을 찍은 고수들이 여러 사연으로 눈먼 인물로 등장한 경우가 꽤 많았다는 사실을요. 보통 그런 인물들은 과묵하거나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이미지와 더불어 시력을 대신하여 (초능력을 포함한) 다른 감각을 극대화한 인물들이 대다수였어요. 지금 코멘트를 작성하면서도 몇몇 전형적인 눈먼 캐릭터들이 떠오르네요.
저도 막연하게 시각장애인은 깜깜한 밤길도 낮처럼 다닐 수 있고, 당연히 촉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이 뛰어날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근래에 눈이 안 좋아지며 시각장애에 대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시각장애라고 온전한 어둠 속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물체 등은 구분할 수 있지만 흐리게 보이거나 시야의 범위가 좁아지는 시야장애의 케이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정도에 따라 시각에 당연히 의존한다는 사실도요.
초월적인 존재로 시각장애인을 그려내고 소비하는 것도 지극히 비시각장애인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인용문이 왜인지 마음에 닿았는데요. 오는 주말에 『거기 눈을 심어라』를 읽으며 시각장애에 대해 어떤 편견과 무지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깨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시각은 강력한 감각이지만, 신경과학의 발견은 이러한 감각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며 놓치는 정보, 내가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른 새 왜곡되어버린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또 인간과 기술의 결합은 볼 수 있다는 감각의 원천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17세기 자연철학자 로버트 훅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미생물의 세계가 그동안 인간이 보고 알아온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겠죠. 저자의 말처럼 이런 새로운 앎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일단 고정된 양극성을 영원히 괴롭”힌다면, 저는 그 사이를 오래 헤매기보다 “우리의 이야기로 개입하는 방법”(《한편》 9호,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자」)을 택하고 싶어요.
“우리는 물리적인 한 점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는 우선 바늘 끝에 대한 관찰에서 선언한다. 이어서 바늘이 아무리 “날카롭게 만들어져” 있고, 육안으로는 그 끝의 어떤 부분도 구분할 수 없지만, “성능 좋은 현미경” 아래 놓고 보면 그 끝은 “넓고 뭉툭하고 아주 우툴두툴해 보인다.”라고 설명한다. 훅은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뾰족한 원뿔과 전혀 비슷하지 않으며 “점점 가늘어지다가 꼭대기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손상된 몸체의 일부일 뿐”이라고 확인해준다.*
독자는 이제 감각의 신세계, 아울러 생각의 신세계로 들어가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첫 번째 관찰에 담긴 은유적·수사학적 힘은 뻔뻔스러울 만큼 명백하다. 우리는 맨눈, 즉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드러내는 한 점, 말 그대로의 점에서 시작한다. 현미경은 우리에게 보이는 날카로움과 매끄러움이 그것의 참된 속성 또는 최종 실체라는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림으로써, 매끄러운 표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의 크기, 거리, 감각의 예리함에 상대적이라고 깎아내린다. 이런 깨달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일단 고정된 양극성을 영원히 괴롭힐 것이다.
― M. 리오나 고댕, 『거기 눈을 심어라』, 오은숙 옮김, 
「망원경, 현미경, 안경, 그리고 사색」 중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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