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소통의 첫걸음

 

 

나에게 진실하기 그리고 경청하기
지난 주의 레터 「가면 뒤의 얼굴」를 읽고 긴 생각거리를 보내 준 독자님이 있었어요.  아래에 소개해 드려요.
친구의 가면을 벗기려다 화나게 만든 경험이 떠올랐어요.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제가 계속 집요하게 물었어요. 평소에 웬만한 일은 웃어 넘기고 항상 즐거워 보이는 친구였는데 그날따라 그 표정이 너무 가식 같고 짜증이 났었나 봐요. 결국 원하는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친구의 목소리는 화가 배어 있었고 그날 이후로는 서먹해졌죠.
그런가 하면 너무 ‘완벽해 보이는’ 가면을 써서 어떤 당황스러운 주제나 행동도 금방 잘 받아 넘기는 흔히 ‘사회성 좋은’ 친구도 떠오르더라구요. 저 가면을 벗기면 어떤 얼굴이 나올까? 제 속마음은 ‘알고 싶지 않다’였던 걸로 기억해요. 만약 그 진실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오히려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나의 가면을 벗고 다른 이의 가면을 벗기는 일은 이렇게 무서워요. 외모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차별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는 한계까지 짚는 긴 글의 끝에 가면을 벗기려 시도하기보다는 ‘positive 가면’을 만들어서 모두에게 씌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덧붙여 주셨는데요. 가면을 언제 어떻게 쓰고 벗을 것인가? 가면이 온전히 벗겨질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 결과 과연 좋을까? 역시 어려운 문제예요. 
지난 월요일 저녁 저는 이일하 감독의 영화 「모어」와 김병운 소설가의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는 자리에 다녀왔어요. 영화에서 드래그 아티스트이자 배우인 모어는 이런 말을 해요. “보여 주고 싶은 내가 있고 숨기고 싶은 내가 있다. 그런데 숨기고 싶은 내가 몇 배는 더 크다. 나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애가 숨겨져 있다.”
아름답고 당당한 나와 감추고 싶은 나, 보이고 싶은 나와 숨기고 싶은 나 사이를 오가는 나까지도 전부 나라면, 그런 자기를 받아들이는 데서 진실함이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사 때 인용되기도 했던 소설집의 한 대목을 소개해 드려요.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만 손이 묶여 버렸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투명한 글쓰기를 필요로 하는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지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내 이야기를 꼭꼭 숨긴 채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이야기를 꾸며 내려고만 하는 스스로의 글쓰기에 환멸을 느꼈고, 이런 식으로 가다간 반드시 망할 거라는 어떤 확신 속에서 이제껏 써 놓은 원고를 모두 폐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이야기를 해 보는 쪽으로, 그러니까 2011년부터 매년 연례행사처럼 같은 도시를 찾고 있는 나와 내 연인에 대해 써 보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김병운,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271쪽에서
나의 가면을 벗기조차 이렇게 어렵다면 소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과 함께 김혜진의 장편소설 『경청』을 함께 읽어 봐요. 주인공 해수가 경계심 많은 고양이 순무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장면이에요.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과 그 작은 생명체 사이에 어떤 가느다란 유대감이 생겼났음을 알아차렸다. 인간과 동물. 언어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정도로, 아주 최소한의 행위만 허락된 관계. 서로에게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난관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진심이 순무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이상한 확신이고 터무니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
순무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 그녀는 위협적이지 않게, 상체를 조금 숙이고 눈을 깜빡인 뒤 서너 걸음 물러섰다. 순무는 남은 것들을 천천히 핥아먹은 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더 올려다보고는 돌아섰다. 그녀는 그것을 인사로 받아들였다. 영원히 선을 긋는 작별이 아니라 다시 만나자는 약속으로 이해했다. 그녀는 순무를 더 따라가지 않았다. 다만 멀어지는 그 작은 생명체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김혜진, 『경청』, 88쪽에서
해수와 순무 사이의 소통이 포착된 장면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제 프로필 사진 속 검은 코의 개를 처음 마주했던 때, 눈빛과 짖는 소리, 꼬리와 앞발의 움직임에서 개가 원하는 바를 익혀 가던 일도 떠오르고요. 이제는 뒷걸음질하며 작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밥을 달라는 뜻이고, 이불을 핥는 행동은 물을 가져오라는 의미이며, 밥 한 알을 물고 오는 건 같이 놀자는 신호라는 걸 알게 됐어요. 비인간 생명과의 관계에서는 가면을 생각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 온 가면이 별 역할을 하지 못해서 다른 방식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검은 코 개와의 관계는 제게 유일무이하게 소중해졌어요.
그런데 그 다른 방식을 ‘말’로 설명하려 하면 어느 정도 인간적인 틀에 맞추게 되는데요. 그런 한계를 받아들이듯이 가면을 벗어 버린 나, 완전히 ‘투명한’ 나는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일지, 무엇을 숨기고 드러낼지 등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는 어렵다는 점을 수용할 때 ”공허하고 무의미한” 글에서 더 멀리 멀어질 수 있고, 자신의 연약하고 취약한 면까지 안고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