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가면 뒤의 얼굴

 

 

진짜 나를 대한다는 것은
지난 한 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지난 레터에 띄운 시에 관한 감상을 접하며 답답한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고요하고 웅장한 융프라우를 느끼며 있다가, 밑에 참새를 읽으며 울컥했습니다.”라며 말씀을 꺼낸 독자분은 허무하고 먹먹한 요즘 같은 때에도 반려자와 자녀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통해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다른 독자분께서도 “저도 엄마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미 참새처럼 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얼마나 커야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며 가장 소중한 사랑 이야기를 꺼내 주시니, 저 역시 일상을 버티게 한 힘을 떠올리게 됩니다. 비슷한 맘을 품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위로 받은 감상도 공유합니다. 고맙습니다. “편지에서 사랑과 용기를 담은 시를 읽으니, 사고 가운데서 용기내 주신 시민분들이 떠오릅니다.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다시 ‘외모’ 이야기를 소개해 드려요. 아시아인의 얼굴을 소재로 한 작가 다와다 요코의 작품인데요. 단편 「페르소나」에서 독일 유학생 미치코는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남자’ 성룡 김이 ‘아시아인은 선천적으로 표정이 없어 속내를 알 수 없다’는 독일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모함 받는 상황을 지켜봅니다. 이후 그의 결백함이 밝혀지지만 “가면 같은 얼굴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라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죠. 미치코는 일본인다운 얼굴과 일본인답지 않은 얼굴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합니다.
미치코는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서 화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다 씨의 집에 갈 때는 화장을 한다. 처음에는 화장하지 않고 다녔다. 그러면 아유미가 “선생님 얼굴은 일본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이 몸을 바싹 내민 채 코앞에서 미치코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꼭 베트남 사람 같아요.” 그러면 아유미의 어머니가 허둥대며 “아유미, 선생님께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하고 아유미를 엄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마치 아유미가 미치코에게 심한 말을 하기라도 한 듯 머리 숙이며 사과했다. (……)
미치코는 조립식 아파트를 도망치듯 나와서 멀리 갔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갔던 곳에서 도망치듯이 멀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알토나 역으로 향하는 버스에 뛰듯이 올라탔다. 운전기사는 미치코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일까. 단지 정기 승차권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미치코는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일본인의 얼굴이 되게끔 화장을 해야겠다고, 미치코는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 다와다 요코, 유라주 옮김,
「페르소나」, 『개 신랑 들이기』 중에서
낯선 사회에서 단지 얼굴이 다르다는 이유로 의심 받는 주변인, 그 간접 경험으로 인해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쓰며 아시아인도 일본인도 아닌 진짜 자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이 작품은 보여 줍니다.
이번 《한편》에 실린 사회학자 박정호의 글은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의 설명을 빌려 페르소나(persona)를 설명하는데요. 사람(person)을 뜻하는 이 라틴어 단어는 과거 사회가 인간을 가면을 ‘통해(per)’ 어떤 ‘목소리를 내는(sonare)’ 존재로서 인식했음을 알려 준다고 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과거 사람과 달리 지금 현대인들은 저마다 가면 아래 ‘진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회적 관계와 온전히 분리된 얼굴을 찾는 일은 어려워 보입니다. 미치코의 경우처럼 말이죠.
현대의 자아 개념은 이러한 전통적 얼굴 관념에 대한 도전에서 생겨났다. 귀속 지위에 따라 가면을 물려받던 사회가 후퇴하고 각자 원하는 가면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했다. 더 나아가 사회적 역할에 구속되지 않는 자아상이 등장했다. 가면과 자아가 분리된 것이다. 물론 가면에서 삶의 대의명분을 찾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대인 대다수는 페르소나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진짜 자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복면을 쓴 은행 강도도 강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데에서 둘도 없는 나를 찾지는 않는다.
오늘날 개인은 진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은 가면이 아니라 가면 뒤의 얼굴이라고 확신한다. 과거 사람들은 역할 수행에 실패하면 상심했지만, 현대인은 상심하지 않기를 서로 원한다. 가면이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우리는 가면에 전 인격을 할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역할 수행에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위로를 보낸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역할이 무거웠다며 당사자가 아닌 역할을 탓한다. 우리는 역할이라는 거푸집에 강제로 끼워 맞출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안다. 이처럼 서로 체면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가면 뒤의 얼굴, 바로 그것이 자아의 신성함을 표시하는 얼굴이다.
— 박정호, 「얼굴을 잃지 않는 대화」,
  
“일본인다운 얼굴과 일본인답지 않은 얼굴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고, “일본인의 얼굴이 되게끔 화장을 해야” 하는 미치코의 현실에 관자놀이가 띵해지네요.’저 사람은 OO 사람인데 피부색이 밝네, 저 사람은 OO인치고 눈코입이 작군.’ 하면서 마치 인종이 신체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인 양 여기며 판단했던 기억도 떠올라 부끄럽고요. 인종 개념이 얼마나 외모와 결부되어 있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외국인의 모습이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칠 텐데요, 그에 관해 콘텐츠 생산자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한편》 9호의 「왜 TV에는 백인만 나올까?」라는 글도 나란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의 가면 뒤에 진정한 자아가 있든 그런 건 존재하지 않든 관계 맺고 알아 간다는 것이 곧 “서로 체면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 얼굴에 다가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누군가를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보는 것은 영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내 안에 고착되어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편견을 인지하려 애쓰고, 실제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보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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