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소설을 쓰는 마음

 

 

소설 만세! 한편 만세!
한편을 같이 읽어요!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은 주제가 ‘소통’이었어요. 저자와 디자이너, 마케터 들과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는 편집자에게도 소통은 중요하고 어려운데요. ‘콘텐츠’ 관련 북토크에서 리트리버 편집자님이 말해 주셨듯 잡지를 함께 만드는 편집자들끼리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정하는 것부터가 소통의 문제지요.
저는 늘 작가와의 소통이 어려운데요. 예를 들어 ‘마감일까지 원고를 보내기 어렵겠습니다……’ 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로 그가 다시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문자와 전화, 메일로도 안 되면 ‘선생님, 일단 만납시다!’ 해야 할지 같은 것이요.
소통에 늘 어려움을 느끼고 더 잘하고 싶은 편집자로서, 정용준 소설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를 소중히 읽었어요. 정용준 소설가는 2009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내가 말하고 있잖아』 『바벨』 『선릉 산책』 등 여덟 권의 소설책을 썼는데요. 소설가가 소설을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솔직하고 생생하게 풀어 낸 에세이를 함께 읽어 봐요.
나는 소설을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 그의 마음과 감정을 살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알고 확인하는 것을 넘어 알게 된 것에 책임감을 갖고 그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를 믿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소설에 매료되고 지금도 소설을 사랑하는 핵심적인 매력이 그것이다. 뉴스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을 중계해 줄 뿐, 그 사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건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전후 사정과 내면과 이면에 대해 묘사하고 진술하는 일. 인물이 보인다고 하는 것을 작가도 보인다고 해 주는 일.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만들어 주고 그것이 허상이고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의 눈에는 보인다는 것을 믿어 주는 일. 숨겨진 사연과 감춘 사건을 모두 뒤져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문장으로 써내는 일.
알고 싶은 마음은 아는 마음보다 어리석다. 하지만 강하다. 지금 당장은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지만 알고 싶은 마음은 앎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임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잠든 토끼를 이기는 거북이처럼 알고 싶은 마음은 마침내 그 어떤 앎보다 많이 알게 된다.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결국에 나를 더 많이 알게 되는 이는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일 거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계속 소설을 쓰고 싶다.
─ 정용준, 『소설 만세』, 45~46쪽에서 
『소설 만세』를 읽다 보면 소설을 쓸 때의 원칙과 태도뿐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는 순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양감과 좌절이 투명하게 느껴져요. 소설가가 끝내 알 수 없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설을 쓰듯이, 저도 편집자로서 매일매일 소통하면서도 늘 어려운 소설 쓰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리고 책의 가장 끝에 있는, ‘함께 쓰는 소설’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가의 말’ 부분을 곱씹어 읽었어요. 더 나은 소통을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가져갈 수 있는 어떤 태도에 대해 생각하면서요. 이 대목을 읽다 보니 과거의 어떤 순간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어떤 순간은 그래도 그 정도면 잘했다, 싶어지네요.
편집자에 대한 생각과 경험은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단어 하나까지 소설은 오직 작가만 써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작가는 편집자가 원고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어떤 작가는 발상과 아이디어부터 편집자와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생각을 주고받는 작가도 있다.
나는 편집자를 내 글을 가장 많이, 또 깊고 넓게 읽어 주는 최초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가의 편에 서서 어떻게 하면 이 글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고 잘 표현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염려하는 무조건적인 내 편이라고 믿는다. 편집자의 도움으로 어떤 소설의 제목을 정할 수 있었고, 잘못된 정보를 고칠 수 있었으며, 둘 이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 정용준, 『소설 만세』, 208쪽에서 
붉은 얼굴의 편집자님이 곱씹어 읽은 ‘작가의 말’에서 편집자를 이야기하는 말들을 찾아봤어요. “호의와 존중과 사랑으로 내 소설을 나보다 더 염려하는 이가 있다면, 계속 쓸 수 있을 것이다.”(210쪽) 역시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되네요.
최근 재개봉한 영화 「큐어」를 보면서도 저는 편집자와 형사의 역할이 비슷하다고 느꼈는데요. ‘나는 작가가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고민했는데, 인용하신 『소설 만세』에서 설명을 찾았어요.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결국에 나를 더 많이 알게 되는 이는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일 거다.”
‘소통’에 필요한 준비물은 바로 이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겠어요. 돌이켜 보면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했을 때는 내가 상대를 대략 안다고 여겼을 때, 대화에서 상처받았을 때는 상대가 나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였어요. 그럼 누군가에 대해 알기 싫은 마음이 들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내를 죽이고 동료를 죽이는 살인이 연달아 일어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웃겼는지, 언제 무서웠고 슬펐는지 돌아보고 있어요.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1997)의 한 장면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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