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세계화의 시작은 1000년?


살아 있는 것들은 이주한다
$%name%$ 님, 오늘도 한편을 같이 읽어요. 꽃이 만발한 봄날,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저는  춘곤증에 시달리며 한동안 책을 멀리하고 있었는데요. 무려 지난해 말 반비의 ‘책타래’에서 편집자 pip님이 올해의 책으로 꼽아 주신 『인류, 이주, 생존』을 드디어 펼쳐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장바구니에 담지 않을 수 없는 추천의 글이네요. 설명해 주신 것처럼 『인류, 이주, 생존』은 인간와 동식물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한다고 이야기하는 책이에요. 동시에 이렇게 ‘이주’의 관점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일이 왜 어려운지에 대한 책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피부색과 생김새만으로 ‘출신 국가’를 짐작하거나 생물종에 ‘캐나다’거위, ‘일본’단풍나무 같은 이름을 붙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정해진 장소, 서식지에 따른 분류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이 책에는 인간이 ‘차이’에 주목하게 된 배경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도 등장해요. 18세기 장거리 해상 여행이 등장하기 전, 인간은 육로로 이동하면서 단계적으로 달라지는 환경을 마주쳤습니다. 환경적 변화도, 거기에 사는 인간과 생물들의 변화도 어쩌면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점진적이었어요. 하지만 단 한 명의 사람도 마주치지 않고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에 닿았던 18세기의 탐험가들은 갑작스레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 거예요. 그들이 보고 느낀 차이는 본국에서 상상력과 함께 훨씬 더 크게 부풀려졌고요.

『인류, 이주, 생존』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점진적인 이주와 그 과정에서의 마주침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어요. 대항해 시대 이전의 이주는 어땠을까요? 마침 콜롬버스의 탐험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선 1000년 무렵 세계화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책 『1000년』이 출간되어 소개해 드려요. 

1000년은 세계화가 시작된 해였다. 전 세계에 무역로가 뚫려 상품, 기술, 종교, 사람들이 본고장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 그때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변화는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정도로 컸다. 바이킹 탐험가들도 1000년에(아니면 고고학자들이 그에 가깝다고 본 시기에) 고향 땅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뒤로하고 북대서양을 넘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캐나다 북동해안에 있는 뉴펀들랜드섬에 도착했다.(그보다 1만 년도 더 전에 시베리아에서 아메리카 서해안으로 이주의 물결이 들이닥쳤던 이후로는 아메리카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바이킹의 이 탐험은 기존의 무역로들을 (앞으로 우리가 아프로-유라시아로 부르게 될 대륙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와 연결한 탐험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물건 혹은 메시지가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1000년 무렵에 활동한 다른 주요 탐험가들은 노르드인Norse과 같은 유럽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이었다. 당시에 정기적으로 이용되던 세계 최장의 해상로도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오만의 도시들을, 바그다드와 가장 가까운 도시 바스라를 중국과 이어 준 통로였다. 그 페르시아만-중국 해로는 두 성지 순례길(하나는 중국에서 메카로 가는 무슬림들이 이용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프리카인들이 성지를 순례할 때 이용하는 길이었다.)도 결합해 주었다. 교역품은 대부분 아라비아반도에서 중국 남동해안의 항구들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일부 물건은 동아프리카 해안의 항구들까지도 이동했다. 
1000년의 세계화를 이끈 주역에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국, 중동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바이킹도 포함되었다. 이 탐험가들 모두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물건과 난생 처음 보는 현지인들의 물품을 맞바꾸는 물물교환을 하면서 육로와 해로를 개척했고, 이로써 진정한 세계화가 시작되었다. 그 상인과 탐험가들이 개척한 길들로는 물건만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의 왕국과 제국들도 새로 개척한 길들을 통해 접촉했고, 이를 통해 상품, 사람, 세균, 생각들도 새로운 지역들로 옮겨 갔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각지에서 접촉이 일어난 것이고, 그 접촉이 가져온 궁극적 결과가 지금의 세계화인 것이다.

(……)
늘 그렇듯 세계화에는 위험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지구상에는 그들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새로운 위험에맞닥뜨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전략을 세워야 했는데, 그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그 일을 수행했다. 
1000년 무렵의 사람들은 전 세계를 이동하면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야 했다. 낯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일지, 산 채로 붙잡을지를 판단해야 했던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처한 입장도 고려해야 했다. 만에 하나 싸울 경우 이길지 질지도 계산해야 했다. 기술은 누가 나은지, 낯선 이들이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했다. 세계화를 처음 겪는 사람들은 이렇게 무엇을 할지에 관한 합리적 결정을 내려야 했으며, 그들이 내린 결정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 발레리 한센, 이순호 옮김,
『1000년』, 프롤로그에서

발레리 한센은 증기력도 전기도 없던 1000년 무렵 이주를 이끈 에너지원은 “사람, 동물, 물, 바람”이었다고 말해요. 비행기와 줌과 메타버스의 시대에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이주와 마주침인데요. 양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천 년 전 이동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저자는 당시 이동했던 물건을 추적하고, 남아 있는 여행담을 들춰 보고, 이동한 이들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역사서이지만 마치 여행기처럼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에요.
‘차이’와 이동의 관계, 특히 이동 방식에 따라 차이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지적이 매우 흥미로워요. 같은 지역을 두 발로 걸어 다녔을 때와 탈것을 이용해 다녔을 때, 그곳의 장소와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감각이 달라지던 여행 경험만 떠올려 봐도 동의가 되고요. 스마트폰을 통한 경험의 비중이 늘어나는 요즘에는 어느 때보다 이동의 속도가 빨라진 것 같기도 하고, 조금도 이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항해 시대가 아닌 1000년 무렵에서 세계화의 기원을 찾는다는 소개와 ‘여행기처럼 읽히는 역사서’라는 설명에 호기심이 동해 책을 한번 훑어 봤는데요. 유럽에 의해 ‘발견’되기 전 아메리카대륙과 아프리카대륙의 독자적인 교역망을 이야기하는 대목들이 눈에 들어와요. 저도 모르게 유럽 중심 세계사에서 배제된 지역의 문명은 고립된 채로 존재했으리라 생각했나 봐요.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도록 이동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새삼 깨달아요. 그 이동을 위한 방법으로 역시 책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과, 만개한 꽃나무 아래서 『1000년』을 베고 누워도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네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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