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매운 거 말고 맑은 걸로 주세요

 

 

청언(淸言)을 찾아서
오늘도 한편을 같이 읽어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은 오전 9시 30분,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입니다. 밀려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갈 것이냐, 하나씩 미루면서 미룰 것이냐가 문제인데요. $%name%$ 님은 이럴 때 어떻게 시작하시나요?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별생각 없이 클릭하던 뉴스 기사를 끄고 두꺼운 책을 폈어요. 엷은 하늘색의 표지 재킷이 산뜻한데요.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책입니다.
혹시 ‘청언(淸言)’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글자 그대로 맑은 글이라는 뜻인데, 동아시아 문학 전통에서는 잠언집 문체를 청언이라고 불러요. 함축적인 짧은 말로 고결한 취향이나 저속함을 벗어난 인생관을 표현하는 문체인데요. 청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읽힌 『채근담』의 한 쪽을 보면 이렇습니다. 안대회 교수님의 번역과 평설이에요.
진한 술과 기름진 고기, 맵고 단 음식은 참다운 맛이 아니다.
참다운 맛이란 그저 담박할 뿐이다.
신비롭고 기이하며, 뛰어나고 특별한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그저 평범할 뿐이다.
醲肥辛甘非眞味, 眞味只是淡;
神奇卓異非至人, 至人只是常.
[평설] 독주나 기름진 고기, 자극적인 음식은 늘 먹기 어렵고, 쉽게 물린다. 값비싸고 진귀한 음식일지는 몰라도 진정 좋은 음식은 아니다. 참다운 맛이란 특별할 것 없이 그저 평범하고 담박한 맛일 뿐이다.
신비롭고 기이하며, 뛰어나고 특별한 사람을 더없이 덕이 높고 완전한 사람으로 알고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기인이나 재사일지는 몰라도 완전한 사람은 아니다. 완전한 사람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있다. 일상의 평범한 음식이 최상의 맛이요 주변에 평범한 이들 가운데 완전한 사람이 있다. 특별한 그 무엇에서 가치 있고 훌륭한 것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 홍자성, 안대회 평역,
『채근담』, 60쪽
독주와 자극적인 음식을 섭취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위장의 근심을 얻었던 지난 주말을 들킨 느낌인데요. 식당에서 매운 거 말고 맑은 국물을 주문하는 광경이 그려져요. 저는 “주변에 평범한 이들 가운데 완전한 사람이 있다.”라는 평설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뛰어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이상이 왜 그렇게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스트레스를 주는지, 왜 우리의 일을 풀리는 방향이 아니라 꽉 막히는 방향으로 이끄는지 답답해하던 차였거든요.

역시 맞았군요.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라는 표현 말이에요.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존재하는 완전체라니…….  그치만 저처럼 일평생‘뛰어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분도 있겠죠?

동종 업계에 있는 비슷한 경력의 친구와 자주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우린 늘 어딘가에 끼인 채로 애매하고 어중간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라고요. 특출난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며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곤 하는데요. 사실 저는 그 말에 오히려 위로를 받아요. 힘도 나고요. ’비범하지 않은’ 어중간한 사람이니까 성실하게, 꾸준히,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거든요. ’비범하지 않은’ 소중한 가치와 나의 일상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요.

버티기…… 이 책을 내면서 안대회 교수님도 힘주어 말한 바네요. “견뎌 낸다는 뜻의 내(耐) 자는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표어입니다.” 채근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나왔다지만, 풀뿌리만을 씹으며 현재를 버티기란 너무 써서 온갖 상상과 지난 기억 속으로 빠져들기 마련인가 봐요.
저는 ‘견디기’라고 하면 젊고 슬픈 베르테르의 첫 번째 편지도 늘 떠오르는데요. 상상력 풍부한 베르테르가 친구에게 연애 얘기를 늘어놓은 끝에 덧붙이는 다짐이에요.
아아,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푸념할 수 있다니 인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친애하는 벗이여, 자네에게 나는 약속하겠어. 마음을 고쳐먹겠다고 말야. 내가 이제까지 늘 하던 대로 운명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조그마한 불행을 부질없이 되씹던 그런 습관을 이젠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겠어.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말야. 확실히 자네 말이 옳았어. 친구여, 만일 인간이 ─ 왜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 그처럼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나간 불행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현재를 무난하게 참고 견디어나간다면 인간의 고통은 훨씬 줄었을 거야.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박찬기 옮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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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보겸
    2022.4.11 7:34 오후

    이번에 받은 편지가 지금까지 받아본 모든 한편 편지 중에 제일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