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F 쓰는 토끼와 함께

 

 

장르를 넘나드는 듀나의 세계

월요일에 첫 번째 편지는 잘 받으셨나요? 만약 놓치셨다면, 지난 편지는 여기에서보실 수 있습니다. 

늘 진심으로 글을 쓴다는 김보영 작가님의 인터뷰 편지에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화답해 주신 분들이 많은데요. 일부를 소개해 드릴게요. 
[SF가 좋다, 월요일이 좋다]
아침 출근 후 메일을 보고 무료한 월요일에 첫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직장에서 몰래몰래 인터뷰를 읽으면서 SF란 무엇일까, 판타지란 무엇일까, 상상을 하다보니 어느새 감기던 눈이 초롱초롱 영혼을 되찾았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저도 월요일 아침 이런 기분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답니다! SF가 주는 환상의 힘이란 이처럼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것 아니겠어요?
[나는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한다]
“작가님 인터뷰 재밌어요! 다만 SF에 대한 개괄적인 얘기 외에도 책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조금 더 있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는데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올해 봄 나올 인터뷰집 단행본을 정말 기대하셔도 좋겠어요. 여기 미처 옮기지 못한, 작가가 직접 말하는 작품 이야기가 정말 정말 많거든요.
[귀여운 게 제일 좋아]
고양이가 너무 귀엽습니다! 작은 흑표범같아요!” 
반지르르한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라니 정말 SF같은 생명체 같아요.”
고양이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역시 귀여움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없나 봐요.
오늘 함께할 작가님 역시 귀여움하면 빼놓을 수 없지요. 오랫동안 한국에서 SF를 써온 작가, 영화평론가, ‘듀나 게시판’의 주인, 그리고 귀여운 갈색 토끼의 얼굴로 글을 쓰는 듀나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곧 나올 인터뷰집 단행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토끼 사진을 얼굴 사진 대신으로 쓰고 계십니다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도 토끼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쓰셨고요.
 
그냥 귀여워서 쓴 거죠. 귀여운 게 많으면 좋잖아요. 초기에는 돌고래 사진을 잠시 썼는데 토끼의 힘이 세네요. 토끼는 귀엽지만 최근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고양이랑은 같이 살아서 어떤 동물인지 아는데 토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지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로 취임하실 때는 토끼 인형이 참석을 대신했는데요. 귀신 들린 인형으로 유명한 애나벨에서 이름을 따와 듀나벨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듀나벨에게 일을 시켜야겠다고 하신 것도 기억이 나요. 듀나벨이 애나벨처럼 살아 움직인다면 무슨 일을 시키고 싶나요?
 
원고요. 당연한 걸.
 
글을 쓰면서 제일 고통스러울 때는 언제인가요?
이야기가 막힐 때. 대부분 그렇죠. 몇십 페이지 정도 잘 나가다가 덜컥. 막힌 자리에서 몇 달 동안 멈춘 채 있을 수도 있고요. 지금이 그렇거든요. 미스터리인데 심지어 막힌 지 너무 오래되어서 누가 범인인지도 까먹었어요. 진상을 다시 만들어야 해요. 저는 배경을 다 만들어두고 쓰지 않아서요. 일단 디테일을 쌓기 시작하면 의도했던 것과 다른 구조가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다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해결책이 나오기도 하고. 그럴 때는 재미있지요.  

듀나 작가 대신 사진 촬영 중인 듀나벨. 
살아 움직이게 된다면, 듀나 작가 대신 원고까지 써야 한다.
취미생활이 있나요? 그런 활동이 글에 반영되는지도 궁금한데요.
 
영화, 공연, 전시회, 책…… 가끔 레고. 전 일단 일 때문에 뭐든 꾸역꾸역 머릿속에 넣어야 해요. 아이디어가 생기면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하지요.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는 최대한 다양한 재료를 허용하려고 해요
얼마 전에 쓴 단편 「화성의 칼」의 경우 웰즈의 『우주전쟁』 같은 전쟁이일어났던 세계라면동북아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를 상상하다 쓴 이야기인데요. 일단 이렇게 낯선 재료 둘이 합쳐지면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최대한 끌어와야 하거든요. 이 경우는 시대물이니 어쩔 수 없이 간접 경험에서 재료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요. 결국 최근 접한 책, 공연의 조각들이 딸려 나오지요. 글쓰기는 아무렇게나 쌓은 잡동사니에서 쓸모있는 걸 찾는 작업에 가깝지 않을까요.
인물을 만들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이름은 어떻게 정하시는지. 예를 들면 민트의 세계에서 민트는 왜 민트인지, 민트의 본명인 류수현은 어디서 나왔는지.
 
전 인물을 만드는 데엔 큰 관심이 없어요. 이야기를 끌어가는 도구로서 기능하면 만족해요. 그러는 동안 여분의 개성이나 매력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일부러 고민하면서 그런 작업을 할 필요는 없지요
 
민트는 철저하게 공허한 이름이에요.친구가 자기 이름을 이용해 아이디를 지었는데 그걸 훔친 거잖아요. 민트는 자기 것이 없는 아이지요. 심지어 고정된 얼굴도 없는 캐릭터예요. 단지 그릇처럼 비어서 다른 사람들의 의지와 욕망을 담죠. 그걸 의미했어요
류수현은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임수정이 연기했던 배역 이름이에요. 20년 동안 임수정 캐릭터 이름을 쓰는 게임 비슷한 걸 하고 있어요. 저는 「시카고 타자기」를 진짜로 싫어하는데 심지어 제 단편 「대본 밖에서」는 그 드라마의 안티 팬픽 비슷한 거예요
 
한국의한국다운 SF를 쓴다고 의식했던 적이 있나요등장인물 이름도 초기부터 한국식 이름이 많았고요
 
한국인 이름을 쓰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외국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저는 한국 SF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이 없었는데한국어로 SF를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은 늘 있지요이 이야기 안에서 내가 쓰는 언어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이건 영어권 작가들은 전혀 또는 거의 하지 않는 고민이지요그 사람들에겐 영어권이 세상의 중심이니까.

 

 
기억 왜곡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화자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함이 드러나는, 자기가 자신임을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이라는 연속성을 놓치는 이야기가 있어요. 「디 북」도 그랬죠.
 
그건 그냥 현실이잖아요. 우린 흐린 기억 속에서 살고 그 부정확한 정보가 우리를 만들고요. 우리 장르는 그 현실의 경험을 보다 명확하게 할 수 있죠. 테세우스의 배는 그냥 존재하는 거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배를 보고 분류하는 거죠. 존재의 일관성은 생각만큼 안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미 20세기 작가들이 한 고민인데 제가 또 할 필요는 없잖아요. 고민한다고 새 답이 나오는 질문도 아닌 거 같고요. 이미 주인공들은 그런 상태로 존재하는데 내가 진짜냐가 중요할까요. 가진 정보가 사실과 일치하느냐는 여전히 중요하겠지만요.
 
 

듀나 작가의 트위터 프로필 사진.
인터뷰를 진행한 심완선 SF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SF 작가가 토끼라는 점은 매우 신나는 일이다.”
SF를 써서 좋은 점이 있나요? 혹은, SF를 읽는 이유는요? 듀나 님은 1990년대부터 SF를 쓰셨는데요. 혹시 변화를 느끼는 점이 있으실까요.

전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이 장르 글을 써요. 세계를 만들어야지 이야기가 나와요. 지금 제가 사는 세계만으로는 부족해요. 제 경험을 쓰는 것도 재미가 없고. SF를 읽는 건 어린 시절부터 습관이었어요. 그냥 좋아서 읽었죠. 1970~1980년대 대한민국은 별 매력이 없는 곳이었고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지금은 아무래도 한국어 SF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으니까요. 장르 자체가 일상화된 것 같아요. 암중모색하던 1990년대와는 분명 다르죠. 텔레비전에서는 타임슬립 같은 게 인기지요. 확실한 건 더는 SF 장르가 소수의 마니아만을 위한 게토라는 핑계는 댈 수 없단 거예요. 국내 SF가 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거죠.

 

 
저는 전에 듀나의 『아직은 신이 아니야』를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대신 추천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둘 다 지금의 인류가 사라지는 이야기잖아요생은 계속되지만 익숙한 세계는 사라지죠어떤 것이 남고 어떤 것이 사라질까요?
 
『아직은 신이 아니야』 마지막 챕터를 쓸 때는 『유년기의 끝을 의식했어요점점 주제가 겹쳐서요결말에서는 오마주로 그걸 밝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다만 의도하지 않은 점도 있어요『유년기의 끝에는 초월적 존재인 오버마인드로 도약하지 못하는 오버로드라는 존재가 나오고『아직은 신이 아니야』에는 초능력에서 벗어난 돼지들이 나오죠둘의 유사점은 제가 계산해 넣은 게 아니에요.
 
하여간 사람들과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그게 우리의 직관과 어긋나는 생각일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린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고낯설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팬데믹으로 인해 스스로 변한 점이 있나요?

우울해졌어요. 저 자신은 그렇게 바뀐 게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는 걸 보게 되니까요. 역병이 지금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 같아요. 세상이 너무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다른 길이 떠오르지 않아요. 종말론 소설처럼 멸망이 그렇게 짧고 쉬울 리가 없죠. 우린 고통 속에서 오래오래 살 거예요. 

 

전 인류가 초능력자인 SF 읽어 봤어?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SBI 연구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정체불명의 괴물들을 날려 보냈다.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대기업과 군대와 세상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자기네들이 그럴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049년의 대한민국, 전 인류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염동력, 정신감응력, 치유력, 비행술, 발화능력, 자폭능력 등등…… 하지만 이 초능력을 발휘하려면, ‘배터리’라는 존재가 필요한데요. 시민들은 배터리의 잠재력을 통제하려는 거대기업 LK와 정부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맞서 혜성같이 등장하는 주인공 민트! 최고급 초능력을 가진 소녀 민트는 인천에서 ‘봉기’를 일으킨 10대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주역입니다. 민트의 본명은 위의 인터뷰를 잘 읽으셨다면 이미 알고 계시겠죠? 민트와 아이들은 과연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추리와 미스터리, SF를 넘나들며 장르 문법을 비트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 작품의 또다른 재미는 바로 익숙한 지명입니다. 인천, 일산, 용산역 그리고 서동탄행 지하철 등에서 벌어지는 낯선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SF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거예요. 

『민트의 세계』 (창비, 2018)
민음사
hel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