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초고를 못 써서 죽을 수가 없다


사마천이 쓴 편지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권위’ 편과 나란히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들을 뉴스레터로 만나고 있지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흉노 전쟁에서 신명을 바쳤음에도 멸족을 당한 이릉 장군의 이야기를 먼저 읽었는데요. 오늘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극형을 당한 사마천의 목소리를 들어 봅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재미있는 역사책 『사기』가 탄생한 과정! 그 과정을 후배 역사가인 반고가 『한서』에 기록했으니, 파란색 글자는 반고의 기록이고 검은 글자는 사마천의 기록입니다.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났다. 하산(河山)의 북쪽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열 살 때 이미 고문(古文)을 송독할 줄 알았다.
 
스무 살에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유역을 유람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임금이 묻혔다고 알려진 동굴을 살펴보고 〔순임금의 능이 있는〕 구의산(九疑山)을 돌아보았으며 배를 타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유람했다. 다시 북쪽으로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나라의 도읍 임치와 노나라의 도읍 곡부(曲阜)에서 학업을 익히고 공부자(孔夫子)가 교화한 유풍을 관찰했으며 추현(鄒縣)과 역산(嶧山)에서 향사(鄉射)의 의례를 익혔다. 피현(蕃縣), 설현, 팽성에서 곤경을 겪은 뒤에 양(梁)나라와 초나라 땅을 지나 장안에 돌아왔다. 그 뒤에 낭중 벼슬에 올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쪽에 출사했다. 파, 촉 지방의 남쪽 땅을 정벌했는데, 공과 작, 곤명 부족을 공략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복명했다.
 
그해에 황제가 하늘이 한나라를 봉했음을 고하는 봉선 제사를 처음으로 올렸다. 그런데 태사공은 주남(周南)에 있으면서 따라가서 참예하지 못한 충격으로 격앙했다가 죽기에 이르렀다. 그때 바로 아들 사마천이 출사했다가 돌아와 황하와 낙수(雒水) 사이에서 부친을 만났다. 태사공이 사마천의 손을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
 
“우리 조상은 주나라의 태사였다. 상고 시대 순임금과 하나라 때부터 천문 보는 일을 주관하면서 공명을 혁혁하게 드날렸으나 후대에 쇠락했으니 이제 나에 이르러 끊어질 것인가! 네가 뒤를 이어 태사가 되면 우리 조상이 해 오던 가업을 잇겠구나. 이번에 천년 대업을 이은 폐하께서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을 때, 나는 수행하지 못했다. 이는 정해져 있던 내 운명이었다! 내 운명이었어! 내가 죽고 난 뒤에 너는 꼭 태사가 되어야 한다. 태사가 되면 내가 말하고 기록하려 했던 바를 잊지 말아라. 다시 말하지만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에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발전하고 입신으로 완성하니, 후대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빛내는 것, 이것이 바로 효를 크게 떨치는 것이다.
 
무릇 천하가 주공(周公)을 칭송하는 것은 주공이 문왕과 무왕의 공덕을 칭송하여 노래를 짓고 주남과 소남(召南) 지방의 풍속을 선양하며,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와 왕계(王季)의 지혜를 통달하고 공류(公劉)의 업적을 언급하며 후직(后稷)을 숭상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시대 이후 왕도가 무너지고 예와 악이 쇠퇴했다. 공자께서 옛 문헌을 수집하여 소멸했던 왕도와 예악을 일으키려 『시』와 『서』를 정리하고 『춘추』를 지었으니 배우는 사람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저술을 준칙으로 삼고 있다. 〔노 애공(魯哀公) 14년〕 기린을 잡다가 기린이 죽은 뒤로 사백여 년이 흘렀는데, 그동안 제후끼리 겸병하느라고 혼전을 거듭하다가 역사 기록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 뒤에 한나라가 일어나 천하를 통일한 뒤로 영명하고 덕행이 높은 군주와 충신, 의사가 나타났으나 내가 태사로 있으면서 그 업적을 기록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사서가 끊어지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이 몹시 두렵구나. 그러니 너는 이 점을 명심하여라.”
 
사마천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소자가 명민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께서 정리하시던 역사 기록을 모두 정리하며 감히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사마천은 형을 받고 난 뒤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높은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익주 자사 임안(任安)이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옛적 현신(賢臣)의 대의를 따르라고 질책했다. 사마천이 그에게 답장을 보내 말했다.
 
소경(少卿) 족하
 
전에 보내 주셨던 글에서 말씀하시기를 만물을 대할 때 근신하고,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는 데 힘쓰라고 하셨는데 그 뜻이 아주 간절했습니다. 제가 옛 현신의 법도대로 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면서 세속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능력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일찍이 덕행이 높은 장자의 유풍을 곁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제 몸이 이미 성하지 않게 되어 욕을 입은 마당이라 어떻게 행동해도 질책을 당하게 되어 있어 잘하고자 하는 일도 오히려 해를 부르게 되어 있으니, 스스로 분하고 답답하지만 누구에게 호소할 데도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할 것이며, 누가 있어 내 말을 들을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더군요. 대개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금(琴)을 타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여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을 위해 치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몸이 이미 훼상되었으니, 수후주(隨侯珠)나 화씨벽(和氏璧) 같은 완벽한 재능을 갖추고 허유(許由)나 백이(伯夷) 같은 품행을 지녔어도 마침내 영광되지 못하고 남의 비웃음이나 사서 저 자신을 더럽힐 뿐입니다. (중략)
 
홍진 속에 살자면 고금을 가릴 것 없이 어찌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통해 볼 때 용감한가 비겁한가는 위세에 달려 있고, 강한가 약한가는 형세를 따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니, 괴이하게 여길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물며 어떤 사람이 법으로 처벌받기 전에 자결하지 못하고 조금만 머뭇거리다가는 채찍질을 당해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절의를 지키겠다고 자결을 생각해 본들 때는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대부에게 형을 가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인지상정에 살고 싶지 않아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으니, 모두 부모와 인척을 생각하고 처자를 걱정합니다. 물론 격하게 절의를 지키려고 나서는 사람이야 다르겠지만 그렇게 하는 데에는 또 부득이한 사정이 있겠습니다.
 
저는 불행하여 조실부모하고 친형제도 없이 독신으로 외롭게 살고 있으니, 소경은 제가 처자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용감하다고 하여 반드시 절의를 위해 죽는다는 법이 없고, 비겁한 사내라도 절의를 숭상한다면 어느 곳인들 면려하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비겁하고 연약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원했지만, 살고 죽는 것의 결과가 다른 점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니 무엇 때문에 스스로 옥에 갇히는 욕된 일에 빠져들었겠습니까? 대저 노예나 노복으로 잡히면 바로 자결한다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욕을 당하면서도 참으며 살기를 원했으니, 더러운 땅에 빠져서도 살기를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속으로 하지 못한 일이 있어 이를 악물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비루하게 세상을 떠나간다면 후대에 글을 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부귀했으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자는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뛰어나 보통 사람과 다른 이는 후대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대개 서백은 구금되어 있으면서 『주역』 육십사괘를 계산해 냈고, 중니(仲尼)는 곤경을 겪으면서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추방된 뒤에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저술했으며, 손자(孫子)는 빈각형(髕脚刑)을 받은 뒤에 『병법(兵法)』을 엮었고, 여불위(呂不韋)는 촉 땅으로 좌천된 뒤에 『여씨춘추』의 팔람(八覽)을 세상에 남겼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 옥에 갇힌 뒤에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고, 『시』 삼백 편은 현성들이 의분을 표출하며 지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속에 풀지 못할 응어리가 있었고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옛 사적을 기술하여 후대에게 그 뜻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좌구명은 실명하고 손자는 빈각형을 받아 평생 중용되지 못했습니다. 물러나 방책을 저술하며 분을 풀었는데, 당시에 써먹을 수 없는 글이라도 남겨 자신의 뜻을 밝히고자 했던 것입니다. 근자에 들어 제가 겸손하지 못하게도 모자라는 글솜씨를 붙들어 천하에서 소실되었던 전적과 제도를 망라하여 수집하고, 역사 사실을 연구하고 고증하며, 왕조의 번성기와 쇠락기의 흥하고 쇠한 도리를 헤아리면서 모두 백삼십 편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꿰어 일가의 학설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초고를 완성하지 못했을 때 그런 화를 입었으니 다만 편찬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 안타까워 극형을 당하고도 분을 참았습니다. 저는 그 책의 저술을 마치고 명산에 감추어 두었다가 전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사방으로 통하는 도회지에 유포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전에 받은 모욕의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그 일로 만 번 사형을 당해도 어찌 회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은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을 뿐 속인에게는 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명을 쓰고는 편안하게 살 수 없고 하류들은 비방을 많이 받습니다. 저는 입으로 내뱉은 말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하여 고향 사람들의 심한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조를 욕되게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낯이 있어 부모님의 산소에 다시 성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치욕은 백 대가 지나도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아홉 번 창자가 꼬이고, 앉아 있으면 정신이 아물거려 꼭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하며,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당한 부끄러움을 떠올릴 때마다 등에 땀이 흘러 옷에 흥건하게 배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이미 환관으로 지내는 몸이 되었으니 어찌 물러나 심산의 동굴에 은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때에 따라 고개를 숙이거나 들면서 마음속의 거친 생각과 의혹을 발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뒤에 소경이 저에게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이는 제 속뜻과 어긋나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와서 비록 제가 자신을 잘나 보이도록 꾸미고 좋은 말로 처지를 설명하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믿어 주지 않고 다만 욕을 먹을 뿐이니, 요컨대 죽는 날이 닥쳐서야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글에 제 뜻을 다 실을 수 없어 고루한 뜻을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경서와 그 해설서에서 채록하고 모은 내용과 여러 가지 책에서 인용한 사실 중에는 간략하게 줄인 것이 아주 많고, 어떤 내용은 서로 엇갈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서적을 섭렵하여 경서와 해설서를 꿰뚫고 수천 년 동안에 일어난 고금의 사적을 두루 관통했으니 이는 사마천이 근면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사마천이 사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인의 관점과 아주 달랐다. 사마천은 대도(大道)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할 때에 황로 사상을 우선 적용하고 유가의 육경을 그 아래에 두었다. 유협(遊俠)을 서술할 때에는 처사(處士)를 폄하하면서 간웅(姦雄)을 내세웠고, 화식(貨殖)에 대한 내용을 편찬할 때는 권세와 이익을 숭상하면서 천하고 빈한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는 사마천의 편벽된 관점이다.
 
그런데 유향(劉向)과 양웅(揚雄)같이 수많은 책을 두루 읽은 이들이 모두 사마천을 훌륭한 사관의 재능을 지녔다고 칭찬하고 사물의 이치에 대해 잘 기술한다고 탄복했다. 이들은 사마천이 명확하게 판단한 사실을 두고 화려하게 구사하지 않았고 질박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았으며, 그 글이 직설적이고 해당 사건의 핵심을 짚었으며 공허한 일을 찬미하지 않았고 추악한 일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여 실록(實錄)이라 일컬었다.
 
오호라! 사마천은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었으나 자신의 지혜로도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고 모함을 당하여 극형을 받게 되어 갇혀 있는 동안 의분을 떨쳤으니,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마천이 자신의 몸을 훼상시키게 된 까닭을 더듬어 보면 『시』 「소아(小雅)」에 나오는 항백(巷伯)처럼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니, 대저 『시』 「대아(大雅)」에 “영명하고도 현철하여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었도다.”라고 한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운 일인가 한다.


─ 반고, 신경란 옮김, 『한서 열전 2』
「사마천전」 162~189쪽 중에서

임안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을 택한 사마천의 굳건한 마음이 전해지는 편지네요. 책의 저술을 마치기 전까지는 자신의 죽음을 허무하게 끝내지 않겠다는 강직한 사마천의 의지에 놀랐어요. 죽음을 종용하는 상황 속에서 뜻을 이루기 위해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물며 사소로운 권력 앞에서도 갈대처럼 뜻을 굽히는 저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요컨대 죽는 날이 닥쳐서야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기며 고통의 길을 택한 사마천의 마음이 얼마나 심란했을지 가늠되지 않아요. 

이번 뉴스레터 닉네임 콘셉트가 바로 ‘모두가 예!라고 할 때’잖아요. 모두가 ‘예’ 할 때 ‘예……’라고 뜸들이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마는 저도 사마천 선생님 앞에서 웁니다.  편집자로서야 저자 선생님들을 만나서 늘 “선생님, 초고를 일단 써 주시면 됩니다!” 하고 호언장담하지만, 글을 후세에 남기는 글쓴이의 무게란 얼마나한 걸까요. 저는 반고가 이 『한서』를 쓰면서 150여 년 전 선배인 사마천을 기린 마음을 생각하면 위대한 역사가들이자 오래전 옛사람들이 문득 가깝게 여겨지는데요. 2000년이 넘는 간격을 메우면서 2021년 시점에서 『한서 열전』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번역자의 콘텐츠도 소개해드려요!

「사마천전」을 쓰면서 반고는 『사기』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를 거의 그대로 옮긴 뒤에 사마천이 지은 「보임안서(報任安書)」를 덧붙여서 완성했다. 「태사공 자서」는 크게 사마천의 자서전과 『사기』의 서문 및 일러두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을 읽고 사마천 집안의 내력을 알고 나면 사찬(私撰) 사서 『사기』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어 있었다. 반고는 이에 더하여 「보임안서」를 싣고 사마천이 불굴의 의지로 『사기』 편찬을 완성했다는 점을 밝혔다. 「보임안서」는 사마천 인물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문선(文選)』에 재수록되었다. 
사마천은 『사기』를 두고 “관련 사료를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는데, 이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사기』는 애초에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 『태사공(太史公)』, 『태사공전(太史公傳)』으로 불렸다. 사기(史記)는 사서를 일반적으로 부르던 말이었으나 삼국 시대부터 사마천의 『태사공기』를 ‘사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반고는 사마천의 사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사마천의 기록이 신뢰할 만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것일 때 그대로 옮겼다. 사찬 사서 『사기』가 정사(正史)의 원조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한서』의 보증 덕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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