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전쟁에 졌으니 죽어야겠다!


장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권위’ 편과 나란히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들을 뉴스레터로 만나고 있어요. 오늘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니오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황제의 뜻을 거슬러 노여움을 산 이유로 궁형을 다한 사마천의 일이지요. 이번 주에는 사마천이 황제의 역린을 사면서까지 변호했던 이릉 장군의 사정을 먼저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때는 기원전 99년, 한나라 무제의 명으로 이릉 장군은 흉노를 정벌하러 떠나는데요…….

준계산에 도착한 이릉이 선우의 군대와 마주쳤다. 삼만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기병 부대가 이릉의 군대를 포위했다. 이릉은 양쪽 산 사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큰 수레를 보루로 삼았다. 이릉의 군사가 보루 바깥쪽에 진을 쳤는데 앞줄은 미늘창과 방패를 들고 뒷줄은 활과 쇠뇌를 들었다. 이윽고 이릉이 명령을 내렸다.
 
“북소리를 들으면 진격하고, 징 소리를 들으면 멈추어라!”
 
한나라 군사의 수가 적어 보이자 적군이 보루까지 곧바로 전진해 왔다. 이릉이 육박전으로 흉노와 접전하면서 천 대의 쇠뇌를 일제히 발사하게 했다. 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흉노 군사들이 쓰러졌다.
 
적군이 후퇴하며 산으로 달아가자 한나라 군이 추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선우가 크게 놀라 근처 좌우 지역에 주둔시켜 둔 기병 팔만여 명을 불러들여 이릉의 군대를 공격했다. 이릉의 군대는 교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며칠 동안 남쪽으로 행군하여 산골짜기에 도착했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군사들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이 세 군데면 수레에 태우고 두 군데면 수레를 끌게 하고 한 군데면 무기를 쥐고 싸우게 했다. 이릉이 말했다.
 
“우리 편 사기가 쇠퇴하여 진격의 북을 울려도 높아지질 않는데 어인 까닭인가? 혹시 군중에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릉의 군대가 출동할 때 함곡관 동쪽에서 변방으로 이주했던 도적 떼의 여자들이 부대를 따라와 군사들의 아내 노릇을 하면서 수레 안에 많이 숨어 있었다. 이릉이 그 여자들을 찾아내서 모두 검으로 베어 버렸다.
 
이튿날 다시 교전하여 흉노군의 머리 삼천여 급을 베었다.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후퇴했는데 예전 용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서 행군했다. 네댓새 만에 갈대가 자라고 있던 큰 못에 이르렀다. 적진에서 바람을 타고 갈대밭에 불을 지르자 이릉도 아군을 구하려 군중에 명령을 내려 맞불을 놓게 했다.
 
남쪽으로 행군하여 산 아래에 이르자 선우가 남쪽 산 위에서 자기 아들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이릉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이릉의 군대는 숲속에서 보병전을 벌여 다시 수천 명을 죽였다. 선우에게 연노(連弩)를 발사하자 선우가 산을 내려가 달아났다. 그날 생포한 흉노 포로가 말했다.
 
“선우가 ‘이놈들은 한나라의 정예병이라 공격해도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밤낮으로 우리를 남쪽으로 유인해 와서 이미 변경 가까이까지 왔다. 변경에 혹시 복병이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당호(大當戶)와 군장(君長) 들이 이구동성으로 ‘선우께서 친히 수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 수천 명을 공격했는데 섬멸하지 못하면 앞으로 신하들이 다시는 변방에 주둔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한나라가 흉노를 더욱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산골짜기 사이에 있을 때를 이용해서 다시 힘껏 싸워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사오십 리만 가면 평지이니 거기에 이를 때까지 격파하지 못하면 바로 회군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릉의 군대는 사정이 아주 급했다. 대규모 흉노 기병을 맞아 하루에 수십 합을 접전하여 다시 적군 이천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적이 퇴각하려고 했다. 마침 이릉 군대의 군후 관감(管敢)이 자신의 상사인 교위에게 모욕을 당한 뒤에 흉노로 달아나 항복하고는 이릉 군대의 사정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이릉의 군대는 후방에서 오는 구원병이 없고, 쏠 화살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지금 싸울 능력이 있는 부대라면 고작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와 교위 성안후(成安侯)의 교(校)가 팔백 명씩 남아 있는데, 선봉에 서서 황색 깃발과 백색 깃발을 기치로 들고 있습니다. 정예 기병으로 그들을 쏘게 하면 곧바로 격파할 수 있습니다.”
 
관감을 얻은 선우는 크게 기뻐하며 기병으로 하여금 일제히 한나라 군을 공격하면서 “이릉과 한연년은 빨리 항복하라!”라고 고함을 질러 대게 했다. 이어서 길을 막고 이릉의 군대를 거세게 공격했다. 그때 이릉의 군대는 골짜기에 있었는데 적군이 산 위에서 사방으로 화살을 쏘아 대자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남쪽으로 행군하여 제한산(鞮汗山)에 닿으려면 하루를 더 가야 하는 지점에 이르러 한나라 군은 보유하고 있던 화살 오십만 개를 다 써 버렸다. 그 즉시 수레를 버리고 행군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군사는 삼천여 명이었다. 무기가 다 떨어지자 군사들은 하는 수 없이 수레의 바큇살을 잘라 내어 들고 군리는 단도를 쥔 채 제한산에 당도하여 협곡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그 후미를 차단하고 산비탈에 올라가 돌을 던지니 군사들이 많이 죽게 되어 더 나아갈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 이릉이 갑옷을 벗은 차림으로 혼자서 군영을 걸어 나가며 좌우에서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말렸다.
 
“나를 따르지 마라! 대장부 혼자 가서 선우를 잡겠다.”
 
한참이 지난 뒤에 이릉이 돌아와 장탄식하며 말했다.
 
“전쟁에 졌으니 죽어야겠다!”
 
군리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장군의 위무는 흉노를 떨게 했지만 천명이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먼저 항복하고〕 뒤에 돌아갈 방법을 찾으십시오. 삭야후가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달아나 돌아왔을 때에 천자께서 예로써 대접한 적이 있으니, 하물며 장군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릉이 말했다.
 
“공은 그만두시오! 내가 죽지 않으면 장사가 아니지.”
 
그리하여 군기를 잘라 모두 부러뜨린 뒤에 귀한 군용 기물을 땅에 묻었다. 이릉이 탄식하며 말했다.
 
“화살 수십 개만 새로 얻어도 포위를 벗어날 수 있겠는데, 지금은 다시 싸우려 해도 무기가 없으니 날이 밝으면 앉아서 결박당하게 생겼구나. 새나 짐승처럼 각기 흩어져 달아난다면 이곳을 벗어나 귀환하여 천자께 보고하는 자가 생길 것이다.”
 
군사마다 건량 두 되와 먹을 물 대신 얼음 한 덩어리를 지니게 하고 차로장(遮虜鄣)까지 가서 서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밤중에 북을 쳐서 군사를 출발하게 하려고 했으나 북이 울리지 않았다. 이릉과 한연년이 말에 오르자 장사 십여 명이 뒤를 따랐다. 적군의 기병 수천 명이 그들을 추격했으므로 교전이 벌어져 한연년이 전사했다. 이릉이 말했다.
 
“폐하께 보고할 면목이 없다.”
 
마침내 항복했다. 흩어져 포위를 뚫고 변경까지 이른 군사는 사백여 명이었다.

이릉이 항복한 곳은 변경으로부터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변경 요새에서 황제에게 패배 소식을 보고했다. 황제는 이릉이 전사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릉의 어머니와 부인을 부른 뒤에 관상가를 시켜 그들의 관상을 보게 했다. 그러나 이릉이 사망했다는 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뒤에 이릉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자 황제가 아주 심하게 노하여 이릉을 칭찬했던 진보락을 질책했다. 진보락은 자결했다. 신하들이 모두 이릉에게 죄가 있다고 하자 황제가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에 물어보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적극 변호했다.
 
“이릉은 부모를 효로 섬겼고 선비와 신의로 교류했으며, 언제나 떨쳐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급한 일을 해결하려고 애썼습니다. 평소에 품덕을 쌓았으니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의 풍모가 있었습니다.
 
지금 전투에 나가 한번 패하자 자신과 식구들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신하들이 제멋대로 이릉의 패배를 부풀리고 있는데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이릉은 오천이 못 되는 보병을 데리고 전마의 기량이 우세한 흉노 땅에 깊이 들어가 흉노 기병 수만 명을 짓밟고 눌렀으나, 적군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돌볼 겨를도 없이 활시위를 당길 줄 아는 자들이면 모두 동원하여 이릉의 군대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천 리에 걸쳐 각지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길이 막히자 군사들은 활과 쇠뇌의 시위에 겨눌 화살이 없는 채로 시퍼런 칼날의 세례를 받았지만, 그래도 후퇴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적과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릉의 지휘로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으니 비록 옛적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릉이 비록 패배를 당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 흉노의 수많은 병력을 격파시킨 것은 천하에 드러내어 표창할 만한 일입니다. 이자가 죽지 않았으니 적당한 시기가 오면 공을 세워 자신의 죄를 씻고 한나라 조정에 보답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는 애초에 이사장군으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고 이릉은 이사장군의 보조 역할이나 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릉이 선우의 군대와 맞닥뜨려 싸웠기 때문에 이사장군은 공을 별로 세우지 못했다. 황제가 모함과 비방으로 이사장군을 헐뜯고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사마천을 부형(腐刑)으로 다스렸다.
 
한참 지난 뒤에 황제가 이릉에게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말했다.
 
“이릉이 변경을 출발할 때 강노도위에게 이릉의 군대와 합세하도록 조서를 내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자에게 앞서 조서를 내리는 실수를 범한 바람에 노장으로 하여금 간사한 계교를 꾸미게 했구나!”
 
이에 사자를 보내 적지를 탈출하여 돌아온 이릉 군대의 군사를 위문하고 상을 내렸다.

이릉이 흉노에 한 해 남짓 머물렀을 때였다. 황제가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 땅 깊이 들어가 이릉을 맞이해 오게 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회군한 뒤에 공손오가 아뢰었다.
 
“사로잡은 포로가 말하기를 이릉이 선우에게 용병술을 가르쳐 한나라 군에 대비시켰다고 합니다. 신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이릉의 일가를 멸족시키기로 하고 어머니와 동생, 처자식을 모조리 주살했다. 농서의 사대부들은 이릉이 절개를 지키지 않아 이씨 집안의 이름을 더럽힌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시간이 지나 한나라 조정에서 흉노에 사자를 보냈을 때 이릉이 사자에게 말했다.
 
“내가 한나라를 위해 보병 오천 명을 이끌고 흉노 땅을 가로질렀으나 구원병이 없어서 패배했소. 그런데 어찌하여 한나라를 배반했다 하며 우리 집안을 주살한 것이오?”
 
사자가 대답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 소경이 흉노에게 용병술을 가르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릉이 말했다.
 
“그건 이서(李緒)가 한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오.”
 
이서는 본래 한나라 새외도위(塞外都尉)로서 해후성(奚侯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흉노가 공격하자 항복했다. 선우가 이서를 예로써 대접한다며 늘 이릉의 윗자리에 앉혔다. 자신의 집안이 이서 때문에 주살당한 것을 가슴 아파하던 이릉이 사람을 시켜 이서를 찔러 죽였다. 선우의 어머니인 대연지(大閼氏)가 이릉을 죽이려고 하자 선우가 이릉을 북쪽 지방에 숨겼다가 대연지가 죽은 뒤에 돌아오게 했다.
 
 
 
─ 반고, 신경란 옮김, 『한서 열전 1』,
「이광・소건 전」 912~920쪽 중에서

집안이 다 죽었는데 황제가 뒤늦게 후회하면 뭐하나요…… 역사에 그래도 그 후회가 남았다는 것이 의미 있으려나요? 이릉은 비극적이고 충직한 인물이잖아요. 대혼란의 패배 상황에서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명에 대해, 그의 권위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저는 이 이야기에서 황제가 나중에 후회했다는 부분이 자꾸 떠올라요. 아래에 있는 이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이건 잘못되었으니 다시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했다면, 사실 이런 후회는 할 필요도 없었을지 모르잖아요. 

노여워하는 황제, 후회하는 황제……. 이 뒤로 이어지는 서술에 따르면 이릉 장군은 끝내 한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흉노 땅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반고는 이릉의 할아버지로 평생을 흉노 전쟁에 바쳤지만 역시 전공을 인정받지 못했던 이광 장군 그리고 손자 이릉에 대해서 이렇게 찬을 남기고 있어요. “도가에서는 삼대에 이어 장군이 되는 것을 꺼리는데,
이광을 지나 이릉에 이르자 마침내 그 집안이
멸족당하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다.”  한편 이 「이릉전」에서는 “황제가 사마천을 부형(腐刑)으로 다스렸다.“라는 한 문장으로 등장하는 사마천의 사정은 어떠했는지 다음 주에도 같이 읽어요.

“『한서 열전』을 읽으면 여기에 보존된 전한 제국과 신나라의 문화가 2000년 시공을 넘어 오늘날 동아시아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분열보다 통일을 지향하며 중앙집권제와 지방자치제를 병행하는 정치 체제,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제와 개인의 개성 발휘를 중시하는 선비 문화, 각종 의례와 의식에서 천벌을 두려워하고 음양오행을 따져 앞일을 가늠하는 민간 신앙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하는 전통문화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지침이 될 것이다.” ─ 해제 중에서

반고는 「이릉전」(제24편)에서 흉노 선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릉의 마지막 분투 장면을 자세히 묘사했으며, 이릉이 흉노
군대에게 용병술을 가르쳤다는 모함을 벗도록 그 자신의 입으로
자초지총을 설명하게 했다. 결국 사마천의 억울함을 씻어 준 그
장면은 「보임안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마천 생전의 마지막 외침을 전문 그대로 고이 실어서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꿰어 일가의 학설을 이루고자 했다.”라는 사마천의 종지(宗旨)를 보전했고, 사마천의 후손에 대한 기록까지 남겼으니 반표와 그의 아들딸 반고, 반소는 후대를 위해 불후의 공을 세웠다. 이들은 위대한 스승 사마천을 기리는 정신으로 『한서』를 집필함으로써 그때까지 유랑 중이던 『사기』를 단숨에 정사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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