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서평을 누가 읽는다고 그래요?

 

 

조지 오웰이 서평 쓰던 시절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조지 오웰이 서평 쓰던 시절…… 그때는 서평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었지요! 서평을 쓰는 것은 작가의 특권이기도 했지만, 글쎄요,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우아한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서평을 전문적으로 쓰는 서평가도, 서평 청탁할 이를 찾아 헤매는 편집자도, 심지어 책의 저자까지도 사실은 일반 독자의 자연스러운 감상평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때와 지금의 서평의 위상, 그리고 책의 위상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요? 
담배꽁초가 군데군데 버려져 있고 반쯤 마시다 만 찻잔들이 나뒹구는 침실 겸 거실에서 좀이 슨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삐걱거리는 식탁에 앉아 먼지 수북이 쌓인 종이 더미 사이에서 타자기를 놓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방 안 공기는 차가웠고 탁했다. 그렇다고 종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쓰레기통이 이미 종이들로 찼을 뿐만 아니라 깜빡하고 아직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 2기니짜리 수표가 답장 안 한 편지들과 아직 못 낸 각종 고지서들 사이에 끼어 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주소록에 옮겨 적어 놓아야 하는 편지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주소록을 분실했다. 그것을 찾을 생각을 하면 아니 실제로 무엇인가를 찾을 생각을 하면 그는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실제 나이는 서른다섯이지만 외모로는 쉰 살로 보인다. 대머리에다가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다. 안경을 쓰는데, 하나뿐인 안경을 습관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쓰고 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영양실조 상태일 테지만 최근 운 좋은 일이 연속해서 생긴다면 지금쯤 숙취로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시간 오전 11시 반. 그의 일상으로 보면 이미 두 시간 전에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일을 시작하려고 갖은 애를 썼더라도 헛수고였을 것이다. 거의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애는 울어 대고, 바깥에서는 전기 굴착기가 무언가를 뚫어 대고, 계단에는 빚쟁이들이 쿵쾅거리며 오르내린다. 방금 전에는 우체부가 오늘 두 번째 우편물을 배달하고 갔다. 광고 전단지 두 장과 빨간색으로 인쇄된 소득세 납부 독촉장이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은 작가다. 시인일 수도, 소설가일 수도, 영화 시나리오 작가일 수도, 라디오 극작가일 수도 있다. 작가들은 얼추 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서평가라고 해 두자. 편집자가 소포로 책 다섯 권을 보냈는데 그 묵직한 소포가 종이 더미 사이에 반쯤 가려진 채 있다. 소포 안에는 “서로 관련성이 큼.”이라고 적은 편집자의 메모가 같이 들어 있었다. 소포가 도착한 나흘 전부터 해서 지금까지 마흔여덟 시간 동안 서평가는 도덕적 마비로 소포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심이 선 어제 바로 그 순간 소포를 비로소 풀고 그 안에 있던 다섯 권의 책을 확인했다. 『기로에 선 팔레스타인』, 『과학적 낙농업』, 『유럽 민주주의 간략사』(이 책은 쪽수가 680, 무게가 4파운드다.),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부족의 관습』, 아마 실수로 함께 넣은 듯한 소설 『드러눕는 게 더 좋아』이었다. 800단어 분량의 서평이 다음 날 정오까지 입고돼야만 했다.
이 중 세 권은 그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적어도 오십 쪽 정도는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저자뿐 아니라(물론 저자는 서평가들의 습성을 다 꿰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오후 4시면 그는 책 포장은 뜯어져 있겠지만 신경적 무력감으로 인해 여전히 책을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책들을 읽을 생각만 해도, 심지어 종이 냄새만 맡아도 피마자기름을 넣은 차가운 쌀 푸딩을 먹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그의 원고는 편집자의 사무실에 제때 도착할 것이다. 어쨌든 그의 원고는 언제나 제때 도착한다. 밤 9시 정도 되면 정신은 비교적 맑아질 것이다. 방은 점점 더 추워지고 담배 연기가 점점 더 빼곡할 것이다.

늦게까지 앉아 능숙하게 책 하나하나를 훑을 것이다. 한 권 한 권 내려놓을 때마다 “맙소사, 이런 걸 책이랍시고.”라는 절규를 내뱉을 것이다. 아침이 되면 게슴츠레한 눈과 면도 안 한 얼굴을 하고 신경이 곤두서서는 한두 시간 정도 빈 종이를 바라보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화들짝 겁을 먹고 행동으로 들어갈 것이다. 갑자기 타자기를 두들긴다. 온갖 상투적인 표현들 —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매 쪽마다 기억할 만한 내용이 담긴”, “무엇무엇을 다룬 어떤 챕터가 특히 중요하다.” — 이 마치 자석에 끌린 쇳가루들처럼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뛰어든다. 이런 식으로 서평은 보내야 하는 마감 시간 삼 분 전에 정확한 길이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서로 연관성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은 여러 권의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일은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이 피폐해진 이 사람이 큰 희망을 품고 일을 시작한 때라고 해 봐야 불과 몇 년 전이다.  
 
내가 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정규적으로, 이를테면 일 년에 최소 백 권의 서평을 쓰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혹시 자신들의 습관과 성향이 내가 묘사한 것과 다르다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지를. 어느 경우가 됐든 모든 작가들은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지만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서평을 쓴다는 것은 생색도 나지 않고, 짜증스럽고, 지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 조금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정말 맞는 말이다. — 아무런 자발적인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관한 반응을 계속해서 조작하는 작업인 것이다.
 

아무리 지긋지긋해한다고 해도 어쨌든 서평가는 전문적으로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매년 발간되는 수천 권의 책 중에서 자기가 서평을 쓰고자 하는 책은 대략 오십에서 백 권 정도일 것이다. 만일 최고 수준의 서평가라면 그중에서 열에서 스무 권가량을 담당할 것이다. 아니 두세 권 정도를 담당한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여기에 추가해서 담당한다는 것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제 불멸의 영혼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서평 절대 다수는 대상 책들을 부적절하게 기술하거나 독자들을 오도한다. 전쟁 이후로 출판사들은 예전보다 문학 편집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자신들이 출판하는 모든 책들에 관한 상찬을 이끌어 내는 일을 잘할 수 없게 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평의 수준이 부족한 지면과 여타 불편한 문제로 저하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평론을 돈벌이로 글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지 말자고 제언한다. 전문서야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담당하는 것이 맞지만 상당수 평론, 특히 소설의 경우엔 아마추어 평자들이 담당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거의 모든 책들은, 이런저런 유형의 독자들에게 열정적인 감흥 — 열정적인 혐오도 그중 하나다. — 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확실히 이런 독자들의 생각이 권태감에 빠진 전문가의 생각보다 값질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편집자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일을 조직하기란 매우 어렵다. 현실적으로 편집자는 언제나 오래 같이 일을 해 온 기존의 글쟁이들 — 자신들이 같은 패라 부르는 — 을 다시 찾는다.
 

모든 책들이 서평이 필요하다고 당연시되는 한, 이 문제는 고칠 수 없다. 상당한 양을 쓰다 보면 책 대부분을 과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기 전까지 대부분의 책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론이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써진다면 열에 아홉은 “이 책은 하잘것없다.”일 것이고 평론가 당사자의 반응 역시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가 없고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의 평론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돈을 그런 유의 책을 사는 데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럴 일을 왜 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기 전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일종의 안내 글을, 나아가서는 일종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라는 말이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진다. 만일 누군가가 — 거의 모든 평론가는 이런 식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 『리어 왕』은 훌륭한 희곡 작품이고 『정의로운 네 사람』은 훌륭한 스릴러라고 말할 때 도대체 이 훌륭한이라는 단어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에 최선은 절대 다수의 책들은 그냥 무시하고 중요하게 보이는 극소수의 책에 관해서 아주 긴 평론 — 최소 1000단어가 넘는 — 을 쓰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에 관해서는 한두 줄 정도로 짧게 평론하는 것도 유용할 수 있지만 흔히 600단어 분량으로 쓰는 중간 길이 서평은 진정으로 평론가가 쓰고 싶어 한다고 해도 쓸데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이라면 평론가는 그런 글을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매주 자질구레한 평론만 쓰다 보면 이 글 첫머리에 나왔던 가운 차림의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내려다볼 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두 업에 다 종사해 본 경험으로 말하건대 서평가가 영화 평론가보다 낫다. 영화 평론가는 집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한 번이나 두 번, 극도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오전 11시에는 시사회에 참석해서 싸구려 셰리 한잔에 자신의 명예를 팔아야 한다.
― 조지 오웰, 강문순 옮김, 「어느 서평가의 고백」,
『책 대 담배』, 14~19쪽에서

직업상 한 권의 책에 대한 첫 번째 서평인 보도자료를 주기적으로 써야 하고, 다른 책에 대한 품앗이와 같은 서평 또한 종종 써야 하는 편집자의 입장에서… 백 년 전과 지금의 차이는 바로 이런 독설에 있다는 데 제 파란펜을 걸겠습니다. 조지 오웰 시대에 미디어의 한계로 주류를 점하지 못했던 “열정적인 감흥”을 표현하는 “아마추어 평자”들은 유튜브 댓글에서 매일 만나고 있죠. 모두 같은 찬사 또는 모두 같은 혐오로 수렴되는 댓글들을 볼 때마다 ‘서평은…… 평론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생각하는데요. 위 글에서 그처럼 투덜거리고 놀리고 하다가도 마지막에 제안하는 것처럼 “중요하게 보이는 극소수에 책에 관한 아주 긴 평론”의 매력은 한번 맛보면 헤어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뼈 때리는 조지 오웰 앞에서 추천사와 리뷰를 청탁하는 편집자의 변을 해 보아요. 아직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는 새 책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추천사 한 줄, 띠지 하나 덧붙이고 싶은 욕망이 매번 들지요. 그 한 줄이 책의 좋은 면을 포착하는 문이 되길 바라면서요. 저 역시 추천사와 서평을 보고서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우연히 책을 만난 독자들의 반응이에요. 오늘도 SNS를 떠돌며 댓글을 찾아 읽다가 기쁘고 속상하고 웃고 우는 와중에…… 서평자도 편집자도 생각지 못한 책의 의미를 짚어 주는 리뷰를 만나는 것은 커다란 보람이에요.

책과 담배, 과연 어느 것이 우리(의 주머니)를 수비하고 공격할 것인가! 책을 쓰고, 팔고, 빌리고, 사 본 사람의 속이야기.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죽는다. ‘마음의 양식’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독서란 기호에 불과할까, 기호라면 얼마나 값비싼 기호일 것인가? 뭇 인간에게 드리워진 압제를 고발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인류애를 피력해 온 20세기 문필가 조지 오웰은 이 같은 호기심을 지극히 형이하학적으로 해결했다. 오웰은 책에 한 해 25파운드를 쓰고, 담배에는 40파운드를 썼다. 물론 지독한 애연가에게 독서는 흡연보다 값싼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계산은 그저 저렴하고 유익한 취미 활동에 투자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나 투정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책 소비가 계속해서 저조하다면,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현상이 적어도 독서가 개 경주나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그리고 펍에 가서 한잔하는 것보다 재미가 없어서이지 돈이 훨씬 많이 들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오웰은 날카로운 화살을 제 자신에게 돌린다.
산문집 『책 대 담배』에는 책을 쓰고, 팔고, 빌리고, 사 본 조지 오웰의 진솔한 면모가 살뜰히 담겨 있다. 「어느 서평가의 고백」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찬사해야 하는 고통이,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에는 책의 저술을 둘러싼 실질적인 자유에 대한 의구심이, 「책방의 추억」에는 책이라는 물질을 사고파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진절머리가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가장 두드러진 형태로 책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했던 이 멀티플레이어의 종횡무진을 바라보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토록 속절없이 괴로운 세계에서 왜 쓰기를 멈추지 않았는가? 실패작이 될 것이 분명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면서 오웰은 말한다. 자신의 모든 책은 실패작이지만, 쓰고 싶은 것임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그저 ‘쓴다’라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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