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권위란 무엇인가?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5호 ‘권위’를 준비하는 편집부의 첫 질문은 ‘권위란 무엇인가?’였어요. 권력보다 부드럽지만 영향력보다 강한 힘, 권위는 권력과 어떻게 구별될까요? 권력, 폭력, 권위, 지배……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힘을 정치철학에서는 어떻게 구분 짓고 있는지 함께 알아봐요. 
1987년 10월 29일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헌법 조항들 중 이 조항이 정치철학자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인민주권’과 같은 민주주의의 일반적 원칙을 재천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이 조항이 제도 이외의 방식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집단행동을 손쉽게 정당화시켜 주기 때문도 아니다. 바로 정치철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권력’이라는 개념을
대한민국 헌법이 너무나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 이후 ‘권력’과 ‘폭력’, ‘권력’과 ‘권위’, 그리고 ‘권력’과
‘지배’의 경계는 거의 무너졌다. 그러나 ‘권력’과 다른 형태의 ‘힘’의
행사가 정치철학사에서 항상 동일하게 이해된 것도 아니고, 이들을
동일한 정치사회적 요소로 간주해야 할 본질적인 이유가 정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전’을 위해 주권자에게 무제한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근대 자유주의의 출현처럼, ‘권력’과 다른 형태의 ‘힘’의 행사가 동일하게 인식되게 된 계기는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우연하게 도래했다. 그렇기에 여전히 ‘권력’의 경험적인 특성들이
‘권력’에 대한 규범적인 요청들을 완전히 압도할 수 없다. 
 
특히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 ‘권력’에는 그 나름의 도덕적 동기와 합법적 근거를 요구받는다. ‘폭력’과 구별되는 정치사회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권위’와 달리 ‘제도화되지 않은 힘’이나 이러한 ‘힘’에 대한 열망이라는 이유로 경멸받기도 하며,
‘지배’가 부재한 상태를 요청받기도 한다. 키케로(Cicero)가 ‘정당한
권력’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법(leges)’, ‘관습(mos maiorum)’, ‘선례(instituta)’를 제시하듯, 현대 정치철학은 ‘권력’에 대한 무분별한 열망이 가져올 정치사회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규범적 제한을 설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영어의 ‘권력(power)’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할 수 있는(posse)’이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즉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권력’은 ‘힘’의 현재성(energeia)뿐만 아니라 ‘힘’의 잠재성(dynamis)까지 의미했다. 따라서 서양 정치철학사에서 ‘권력’이라는 말은 제도화되었거나 실제
인간관계에서 행사되는 ‘힘’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힘’의 제도화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시원적(始原的)’ 능력을 포괄하며, 정당성과 무관하게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수평적 또는 수직적 관계를 설정하는 원인이자 결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권력’을 인간의 본성과 연관시키려는 정치철학적 노력이나 ‘권력’을 제도화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분석하는 제도사상사의 오랜 습관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찍이 ‘권력’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의 품성’에 주목했던 플라톤에게도 ‘권력’이란 ‘할 수 있는 바를 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았고, ‘권
력’의 분배에 주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권력욕’은 권력의 특성을 좌우하는 요인들 중 하나였다. 즉 ‘권력’과 ‘지배하려는 욕구(libido dominandi)’의 상관관계는 ‘올바른 삶’과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견해 차이와 무관하게 오랫동안 지속된 정치철학적 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 욕망’의 사회적 실현을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규정한 근대 이후부터, ‘지배하려는 욕구’를 통해 ‘권력’을 이해하려는 입장들은 적지 않은 정치철학적 문제를 일으켰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 자체를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나는 권력에 대한 열망’으로 규정함으로써 ‘제도화된 권력’마저도 이러한 권력욕의
연속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권력’과 ‘권위’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권력’과 ‘지배’가 동일시되어 ‘권력 투쟁’이 곧 ‘정치의 본질’이라는 견해를 보편화시켰다. 파시즘에 저항했던 정치철학자들조차 ‘권력’과 ‘지배’의 구분을 권력욕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의 많고 적음에서 찾을 정도였다.
동시에 ‘권력욕’으로 ‘권력’을 이해하는 견해들은 ‘무제한적인
권력’ 추구에 일정한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했다. 제도화 이전의 ‘권력’ 또는 ‘창건(創建)적 권력(foundling power)’을 ‘폭력’ 또는 ‘벌거벗은
권력(naked power)’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정복 군주나 참주에 대항한 집단적 저항마저도 ‘폭력’이라는 범주에서 동일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즉 ‘권력’ 그 자체가 정치의 목적으로 이해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목적이 평가의 주요한 잣대로
기능할 수 없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후의 ‘권력’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든 정치철학자가 바로 아렌트(Hannah Arendt)다. 아렌트는 일차적으로 ‘권력’을 다른 형태의 ‘힘’의 행사와 구별한다. ‘위력(strength)’은 개별 존재의 특성 또는 잠재력(dynamus)으로, ‘강제(force)’는 실질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효력(energeia)으로, ‘권위(authority)’는 정치사회적으로 상대방의 무조건적 인정을 이끌어
내는 ‘힘’으로, ‘권력’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위임’을 통해 ‘집단적인 힘의 행사’에서만 실재하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이런 복잡한 개념 정의는 곧 ‘권력’과 ‘폭력’의 구분으로 수렴된다. 아렌트의 정의를 따르면 ‘권력’과 ‘폭력’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첫째, ‘폭력’은 그 자체로 수단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힘의 행사를
위해서는 다른 수단을 필요로 한다. 즉 ‘권력’은 참주의 손에 쥐어져
있더라도 ‘위력’을 갖게 만드는 집단의 지지 또는 묵인이 전제되지만, ‘폭력’은 그 자체로는 위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강제력을 증폭시킬 수단에 따라 그 위력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권력은 모든 통치의 본질적인 요소”인 반면, “폭력은 통치의 본질적이거나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둘째, ‘권력’은 ‘명령(command)’과 ‘복종(obedience)’의 관계를 전제하지 않지만, ‘폭력’은 이러한 상호관계의 구축을 목적으로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권력’은 집단에 의해 구성되기에 그 ‘힘’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고, 그 ‘힘’의 행사가 집단 구성원이 정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언제나 유효하다. 반면 ‘폭력’은 결코 적법성(legality)을 확보할 수는 없으며, ‘권력’이 매개가 되지 않으면 정당화되기도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은 동일하지 않으며, 둘을 동일한 것처럼 인지하게 된 이유는 전자의 상실이
후자의 필요를 불러와 혼동을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의 ‘권력’ 개념에는 한편으로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과 로마공화정의 역사적 경험이 내재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권력욕’과 등치시킴으로써 ‘권력’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배제하려는
근대적 편견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기에 아렌트는 바람직한 ‘권력’의 행사를 ‘명령’과 ‘복종’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시민들이
만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치로 정의한다. 또한 동일한 이유에서 ‘권력’을 ‘권력에 대한 의지’과 관련시키던 근대 정치철학의 익숙한 편견을 거부한다.
아렌트의 ‘권력’ 개념은 ‘민주적 심의’와 ‘폭력의 부재’라는 정치적 이상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단된 것이기도 하다. 권력의 시원성보다 민주적 정당성이, 권력의 수단성보다 강제의 적법성이 중요하다는 의지가 관철된 것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를 보류한다면, 그녀의 ‘권력’과 관련된 설명들은 몇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권력’과 ‘권위’의 구분이 모호하다. 비록 ‘권력’은 ‘집단의
인정’ 없이도 행사된다는 친절한 설명이 뒤따르지만, ‘제도화된 권력’과 ‘권위’의 차이는 아렌트의 개념만으로는 분명히 전달되지 않는다. 둘째, ‘권력’과 ‘지배’의 차이다. 아렌트는 지속적으로 ‘지배(domination)’와 ‘통치(dominion)’를 구별하지만, 고대 아테네 민주정과 로마공화정에서 자유로운 시민들 사이에서 수평적 소통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던 ‘지배가 없는 상태’를 뚜렷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아렌트의 ‘권력’ 개념은 자유로운 시민들을
‘통치(imperium)’하는 행위와 주인이 노예를 ‘지배(dominatio)’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잣대를 제공하지 못했다. 셋째, ‘권력’의 시원성에 내재한 ‘폭력’의 창조적 특성이 지나치게 폄훼되었다. 아렌트는 다른
저작에서는 ‘혁명적 폭력’ 또는 ‘정초적 폭력’의 정치적 의미를 세밀하게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녀가 고집하는 ‘권력’과 ‘폭력’의 엄격한 구분은 ‘창건(創建)적 권력’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법제정적 폭력(Rechtsetzend Gewalt)’이 정치에서 갖는 의미를 불필요하게 단순화시킬 우려를 낳는다.

‘폭력’과 구분된 ‘권력’ 개념은 ‘권력’의 실제적 행사에 주목하던
학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베버의 입장을 따르는 사회과학자들, 즉 ‘권력(Macht)’을 “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행위자가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개연성(Chance)”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일차적으로는 ‘부당한 권력’조차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정치과정에 대한 관심이 ‘권력’에 대한 규범적 설득보다 더 절실했던 이론적 경향이 작용했다. 이는 폭력이 정치의 본질적 요소로 이해되고, 정치가의 ‘권력 본능(Machtinstinkt)’을 긍정하는 사회적 추세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처음에는 자기 의사와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대한 복종을 유발하는 ‘영향력(influence)’이 부각되었다. 이후 편견을 조작해 특정 의사가 채택될 수 없도록 만드는 권력의 ‘보이지 않는’ 차원이 포함되었으며,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는 선호를 주입함으로써 정치적 의제를 주도하는 ‘잠재적’ 권
력까지 연구가 확대되었다. 급기야 ‘권력’은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행동을 제어하는 사회적 요소이자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capability)’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가운데 ‘권력’의 규범적 내용에 대한 논의는 최소한 분석적 차원에서는
불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권력의 현상적 분석만으로는 ‘바람직한 권력 행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아울러 ‘개인의 자율성’과 ‘권력의 책임’에 대한 정치사회적 요구가 커질수록 ‘권력’의 규범적 규제에 대한 요청이 커졌다. ‘권력’과 구별된 ‘권위’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자발적 순응’을 유발하는 ‘힘’의 정치사회적 자원을 분석함으로써 권력의 규범적 특성을 규명하려는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베버로부터 비롯된 ‘권위(Herrschaft)’의 세 가지 유형(카리스마, 전통, 법) 연구를 바탕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강조하거나 수평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소통적 권력(power with)’과 수직적 위계를 바탕으로 하는 ‘지배적 권력(power over)’을 구분함으로써 전자를 ‘민주적 권력’으로 규정하는 것 모두, ‘권력’의 규범적 성격에 대한 정치철학적 관심을 대변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대한 논의들은 ‘권력’에 규범적 제한을 가하려는 정치철학의 일반적 요구에 여전히 못 미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권력’ 개념에서 보듯 ‘권력’과 ‘권위’의 차이는 더욱 희미해졌고,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졌다. 비록 근대 이후 권력이 갖는 특징을 묘사한 것이라지만, 권력이 ‘규율’과 ‘통제’로 복종적 신체를 만들어 내는 ‘생명권력(bio-pouvoir)’으로 규정되고,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관계가 개개인의 일상까지 예외 없이 적용됨으로써 지배가 생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자발적 동의에 기초하는 전근대적인 ‘주권적 권력(sovereign power)’에 덧붙여 ‘순응하는 개인’을 만들어 내는 근대적인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의 실체를 밝혀 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푸코의 학문적 업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을 ‘지배’와 ‘피지배’로 이해함으로써 ‘권력’에 제도적 제한과 규범적 내용을 부여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편견을 강화시킬 우려도 함께 지니고 있다. 물론 맥락에 따라서는 ‘권위(Herrschaft)’가 ‘지배’로 번역되듯, 권력관계에서 ‘자발적 동의’와 ‘훈육된 순응’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권력’과 ‘지배’의 구분이 다음과 같은 정치철학적 혜안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정치권력의 적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한다. 설령 일관된 잣대를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권력의 정당한 행사를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반면 ‘권력’과 ‘지배’를 동일시하거나
지배가 일상적 인간관계에도 만연된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 그러한 분석이 갖는 정치사회학적 의미와는 별도로 ‘어떤 지배-피지배
관계가 왜 그리고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창건(創建)적 권력’ 또는 ‘법제정적 폭력’의 행사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공해 준다. 새로운 정치체제를
확립하거나 혁명적 권력이 기존 제도를 전복하는 경우 한편으로는
‘권력’과 ‘폭력,’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지배’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러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충고에서 보듯, ‘권력’이든 ‘폭력’이든 그것이 ‘타인에 대한 자의적 지배’를 목적으로 행사될
때, ‘힘’의 행사가 ‘지배’로 귀결될 때,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냉혹한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는
일관된 판단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행사되는 ‘권력’ 또는 ‘폭력’의 해방적 의미를 구별해도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권력’이 ‘공공선’에 헌신해야 할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근대 이전의 정치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권력’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paideia)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때로는 개인의 ‘탁월함(arete)’으로, 때로는 ‘좋은 삶(eu zēn)’의 실현으로
권력에 대한 열망을 권력의 올바른 행사를 위한 성찰로 이끌 것이다.
또한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정치권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일상적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해소하려는 민주적 심의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권력’과 ‘지배’의
구분은 전자의 남용으로부터 개개인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뿐만 아니라 후자의 해소를 위한 적절한 조정 원칙을 제공할 것이다.
― 곽준혁, 『정치철학 1』, 39~49쪽에서
 

권력, 권위, 지배, 피지배, 폭력, 영향력, 정당성, 적법성……  복잡하고 어려운 구분이지만 ‘정치철학자들은 실제 관심사에 따라 개념을 바라본다’는 단서에 따라서 또박또박 읽었어요. 제 관심사는 한국 사회의 ‘실상’을 드러내는 폭력적인 뉴스들과 두서너 사람들끼리 나누는 섬세한 대화들을 어느 하나 무시하지 않고 같은 선상에서 보기인데요. 위의 글에서 지적하듯 권력과 지배를 구분한다면 “냉혹한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부당함을 지적할 수 있는 일관된 판단 근거”를 얻을 수 있겠어요. 폭력 앞에서 “사노라면 겪는 고통, 너무나 지독한…… 모르겠어!” 되기 십상이지만 말이에요. 

복잡한 개념 구분이 생겨난 데에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더 섬세한 개념들이 필요해진 배경이 있었네요. 그 간극을 메우려는 지적 호기심도 있었고요. 저도 권력과 지배를 구분하는 근거들에 관심이 갔어요. 특히 이러한 구분이 “정치권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일상적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해소하려는 민주적 심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부분요. ‘권위’에 대한 고민은 곧 일상에서의 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니까요.

곽준혁 교수는 『정치철학』에서 크게 10가지의 주제를 씨줄로 놓고 45명의 사상가들을 날줄로 엮어 나간다. 고대 그리스는 소포클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고대 로마는 키케로에서 타키투스까지, 중세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단테까지, 르네상스는 마키아벨리에서 루터까지, 근대는 보댕에서 니체까지, 그리고 현대 학자로는 토마 피케티와 조르주 아감벤 등을 소개한다. ➊ 정치와 도덕은 화해 가능한가? ➋ 지배가 없는 권력은 가능한가? ➌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나? ➍ 사적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➎ 좋은 시민이 좋은 사람일까? ➏ 감성적 판단은 바람직한가? ➐ ‘정치적 삶’의 회복은 가능한가? ➑ 법은 지배하는가? ➒ 가능성의 평등은 요원한가? ➓ 설득의 정치는 가능할까?
정치철학의 생명력은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폭력과 사회공학으로 전락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정치철학의 존재 이유는 ‘교조적 이념의 재생산’을 피해 ‘가능한 최선의 실현’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철학의 올바른 역할은 명백히 비이상적인 현실에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방도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정치철학자의 비판적 사고는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정치적 가치를 설득하려는 노력과 어떤 형태의 자의적 정치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이야기하려는 태도에서 빛을 발한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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