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왕을 죽여도 되나요?

 

 

혁명의 원조, 맹자 읽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막 출간된 6호 ‘권위’와 함께 《한편》의 편지 시즌 6이 도착했습니다. 연말까지 세 달에 걸쳐서 함께 탐구할 주제는 바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인류 역사상 가장 반대하기 어려웠던 권위자는 누가 뭐래도 왕 아닐까요? 오늘은 지상의 최고 권력자이자 정치권위의 담지자였던 왕 앞에서 혁명을 논했던 옛사람을 찾아갑니다.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전국 시대의 제나라에서 있었던 대화예요.

제 선왕이 물었다.
“덕이 어떠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인민을 보호하여 왕 노릇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과인 같은 사람이 인민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이 호흘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당 위에 앉아 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 아래로 지나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임금께서 그것을 보시고 물어보시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라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흔종(釁鐘, 종을 새로 만들면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내어 종의 틈에 바르는 제사 의식)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만두어라. 나는 그것이 죄없이 사지로 가는 듯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소를 끌고 가는 자가 ‘그렇다면 흔종을 폐지할까요?’라고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소를 대체하여라.’라고 하셨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면 왕 노릇 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은 모두 임금께서 소를 아끼려 했다고 생각할지라도 신은 진실로 임금께서 소의 불쌍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이 있습니다. 제나라가 비록 작지만 내가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죄 없이 사지로 가는 듯 두려움에 벌벌 떠는 소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양으로 바꾼 것입니다.”
 
“백성이 임금께서 소를 아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짐승으로 큰 짐승을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이유를 알겠습니까? 임금께서 만약 그것이 죄도 없이 사지에 끌려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였다면 소와 양을 어찌 가리시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는 진실로 어떤 마음입니까? 내가 그 재물을 아까워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를 양으로 바꾸었으니 백성이 나를 인색하다 평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곧 인술(仁術)입니다. 소는 보셨으나 양은 보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짐승에 대해 살아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것이 죽어 가는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말했다.
“『시』에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내가 헤아린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을 두고 한 말이군요. 내가 그것을 행하고 나서 돌이켜 무슨 마음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말씀해 주시니 내 마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이 왕 노릇에 부합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임금께 아뢰는 자가 말하기를 ‘저의 힘이 100균을 들기에 충분하지만 하나의 깃털을 들기에 부족합니다. 눈이 밝아 추호의 끝도 살필 수 있지만 수레의 땔나무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임금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임금의 은혜는 금수에까지 이르지만 임금의 공이 백성에게 이르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보면 깃털 하나를 들지 못하는 것은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이며, 수레의 땔나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눈 밝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니,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왕도를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면서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며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노인을 공경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까지 공경하며, 나의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 남의 어린이까지 사랑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운영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말하길 ‘문왕이 먼저 처자에게 모범이 되어서 그것이 형제에게 미치고, 온 나라 안에 퍼지도록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 마음을 들어서 다른 곳에까지 넓혀 미치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널리 펴면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은혜를 널리 펴지 못하면 처자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옛날 사람이 일반인보다 크게 뛰어난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바를 잘 미루어 넓혀 간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은혜가 금수에게까지도 충분히 이르고 있으나 공은 백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저울질하고 나야 경중을 알며 자로 재고 나야 장단을 압니다. 물건이 모두 그러한데 마음은 더 심하니 임금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는 전쟁을 일으켜서 군사와 신하들을 위태롭게 하고 제후와 원한을 맺은 뒤에야 마음이 통쾌하시겠습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내가 어찌 그것에 통쾌하겠습니까? 장차 내가 크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임금께서 크게 원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살지고 감미로운 음식이 잡수시기에 부족하고, 가볍고 따뜻한 의복이 몸에 걸치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주위의 채색이 눈으로 보기에 만족스럽지 않고, 주위의 음악이 귀로 듣기에 만족스럽지 않으며, 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부리기에 만족스럽지 않아서입니까? 임금의 여러 신하가 모두 충분히 이것들을 제공하고 있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것 때문에 그러하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크게 원하시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토지를 넓히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조공 바치게 하고 중원을 차지하여 사방 오랑캐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하시는 바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심합니까?”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습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은 비록 물고기를 얻지 못해도 뒤에 재앙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하시는 바를 얻고자 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 그것을 한다면 뒤에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되물으셨다.
 
“추나라 사람이 초나라 사람과 싸운다면 임금께서는 누가 이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초나라 사람이 이깁니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는 실로 큰 나라에 대적할 수 없고 인구가 적은 나라는 실로 인구가 많은 나라에 대적할 수 없으며 국력이 약한 나라는 실로 국력이 강한 나라에 대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방 1000리가 되는 나라가 아홉인데 제나라의 땅을 모두 합해도 그 아홉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여덟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찌 추나라가 초나라에 대적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역시 왕도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임금께서 정치를 하는 데 인(仁)을 베풀어 천하의 벼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조정에 서고 싶게 하고, 농사짓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들에서 밭 갈고 싶게 하며,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저자에서 물건을 재어 두고 싶게 하고, 나그네들로 하여금 모두 왕의 길을 다니고 싶게 하신다면, 천하에 그 군주를 질시하는 자가 모두 임금께 달려와 하소연하고 싶을 것이니, 장차 이와 같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 선왕이 물었다.
“탕임금이 걸(桀)을 추방하고 무왕이 주(紂)를 정벌하였다는데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기록에 있습니다.”
 
(제 선왕이) 물었다.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해도 됩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한 사람을 일부(一夫)라 합니다. 일부인 주를 살해했다고 들었지 임금을 시해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맹자』 「양 혜왕」 편 중에서

왕 노릇 좀 잘 하라고 꾸짖는 맹자 선생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질타 자체는 익숙하지만, 왕과 신하라는 위아래가 뚜렷한 상황에서 아래에서 위에다 대고 하는 질책이란 사실 살 떨리는 상황이죠. 제일 무서운 건 역시 마지막 부분인데요. 왕 노릇을 잘하지 못한 왕을 죽인 건, 왕을 죽인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을 죽인 것뿐이라고……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렇게 윗사람 귀에 거슬릴 말을 할 때 항상 목이 잘릴 위험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새삼 놀랄 때가 많아요. 듣고 있던 왕은 맹자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 화를 냈을까요? 아니면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궁금한데요. 

전국 시대 왕의 권세란 그 뒤에 오는 진나라 시황제, 한 제국 황제의 권세에야 훨씬 못 미쳤겠지만, 유세객인 맹자가 하고 싶은 말, 논리적으로, 거침없이 하는 모습은 과연 ‘생각은 많고 말은 잘 못하는 편집자 님’ 이야기처럼 놀라워요.(이번 닉네임이 마침 왜 이렇게 대비되는 거죠! ) 그런데 책 『맹자』에서는 ‘왕은 말하고’ ‘맹자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시잖아요. 후대 편집자들의 손에서 이 책이 어떻게 얼마나 편집되었는지도 역시 궁금해요,

공자의 뜻을 확장, 심화시킨 『맹자』는 맹자와 왕 혹은 제자 사이에 오간 대화로 정리되어 있는데 논리가 정연하고 비유가 풍부하며 대화의 맥락이나 흐름이 있어 사서의 다른 책들에 비해 잘 읽힌다. 오늘날에도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오십보백보’, ‘농단’, ‘연목구어’, ‘자포자기’ 등의 성어들이 유래한 책이기도 하다. 제나라 선왕과의 대화에서 “지금은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 주지만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는 기르기에 부족하며, 풍년에도 늘 고생스럽고 흉년에는 굶어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만 죽음을 구제하기에도 부족할까 두려운데 어느 겨를에 예를 닦고 의를 행하겠습니까?”(49쪽)라며 민생 구제를 촉구하고, 또한 왕의 면전에 대놓고 “임금에게 큰 허물이 있으면 간언하고, 여러 번 간언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바꿉니다.”(369쪽)라고 말하는 맹자의 일갈은 20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사회 상황을 조명하며 통쾌함과 씁쓸함을 함께 남긴다.

민음사
1p@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