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멋진 job이 있어

 

 

‘일’ 독자 수기 마지막 당선작

$%name%$ 님, 한편을 함께 읽어요! 취준생의 일 중독 이야기, 일잘러의 번아웃 이야기에 이어서 《한편》 5호 ‘일’ 독자 수기 공모의 마지막 당선작을 보내 드립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잊었던 꿈을 다시 떠올려 보는 이야기예요. “세상에서 내가 해줄 몫이 있어, 오직 나만이 나만이 할 수 있는 멋진 job이 있어”(신화, <Yo!>)라는 강렬한 랩 가사가 떠오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주식을 하는 것 같다. 어느덧 만남에서 주식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서로 주식 종목과 팁을 나누며, ‘빨간 화살표’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숨긴 채 ‘파란 악마’에게 물린 사람들을 위로한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자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다들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에 다니면서 승자와 패자가 매일 바뀌는 주식에 왜 저렇게 목을 맬까 생각하다가도, 나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하나 조바심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어느 날 지인이 코로나 시국에 제대로 주식의 파도에 올라타서 큰돈을 벌어 한턱내겠다고 자리를 만들었다. 들어 보니 집안의 빚 청산은 물론, 서울에 집 한 채는 살 수 있는 돈을 1년 사이에 벌었단다. 다들 터져 나오는 부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지인을 신데렐라로 만들어 준 주식 종목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귀가 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머리는 띵하고 속은 메스껍고 서울의 집값은 귓가에 맴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그 사람은 이제 주식으로 돈을 굴리면서 40대가 되기 전에 이른 은퇴를 목표하고 있다고 했다. 저절로 내 월급이 생각난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평생 일개미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에 한숨만 늘어 가던 때에 문득 ‘언제부터 나는 내 노동의 가치를 돈에만 뒀지?’라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돈만이 내가 일을 하는 이유라면 나도 그냥 전문적으로 주식을 하면서 내 취미 생활을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근데 왜 나는 전문 투자자가 아닌 과학자로 사는 거지? 분명히 이 일을 택할 당시에는 돈을 떠나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일이었기에 시작한 것 같은데, 어느샌가 꿈을 살아간다는 자부심과 설렘은 죽고 일은 그저 고통스럽게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라? 이건 아닌데? 분명히 뭔가 더 있었는데?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나는 왜 이 일을 택했지?

침대에 누워 과학자라는 꿈에 부푼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던 10대 시절을 되짚어 봤다. 뉴런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15년 전쯤에 나로 되돌아가 보니 기억났다. 일단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다. 문제라는 마녀의 탑에 갇혀 버린 답을 구출해 내는 과정을 즐겼다. 그리고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연민과 애정을 느꼈고 치료제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연구원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나도 암 치료제를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만 있다면 며칠 동안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기름진 머리조차도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노력과 운이 따라 준 덕에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결국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일의 가치는 재미와 의미였다. 재미는 나를 위해서, 의미는 우리를 위해서. 이 환상의 이중주는 다시 한 번 나의 보람된 일과 삶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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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in2500 님의 수기

치솟는 서울의 집값을 보며 주식투자를 이제는 정말로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 모습은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아요. 《한편》 5호의 첫 번째 글 「개미투자자가 하는 일」이 생각나는 글인데요. 그 글에 인용된 한 청년 개인투자자의 말이 새삼 사무치네요. “풀린 돈은 굉장히 많고, 돈은 흔한데, 저는 예전과 똑같이 일해서 같은 돈을 벌잖아요, 이건 가치가 떨어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쉽게 경제적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혹은 착각?)을 하다 보면 내 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일개미’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재미는 나를 위해서, 의미는 우리를 위해서”라는 일의 가치를 책 만드는 저의 일에서도 찾아보려고 해요!

이 글을 저의 당선작으로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자라는 꿈”이었어요. ‘내 꿈은 과학자, 대통령,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어린 시절이 오랜만에 생생하게 떠올랐거든요. 제 꿈은 마라톤 선수였고요.  ”깊은 연민과 애정”, “며칠 동안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기름진 머리조차도”라는 표현이 왜 그렇게 가슴을 치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문과에서 이과에 보내는 동경, 지금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나 자신의 떡진 머리? 재미도 의미도 드물고 애써 찾아도 찾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꿈”이라는 말에 내 꿈을 그대로 겹쳐 보게 돼요. 이 글을 보내 주신 sumin2500을 비롯해 《한편》 ‘일’ 수기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일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 스마트하게 직장생활 하는 법, 당장 퇴사해도 되는 커리어 만드는 법,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또는 창조성을 발휘하며 만족스럽게 일하는 법 등등.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의 흐름이다. 한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적다. 과중한 업무량, 위험한 업무 환경, 낮은 임금, 부족한 일자리에 대한 대책까지.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한참 ‘코인 열풍’이 불고 있는 2021년. 이제 와서 일이란 무엇일까? 일하는 보람을 향한 열망과 벗어날 수 없는 노동의 굴레 사이에서 인문잡지 《한편》 5호는 ‘일’을 탐구한다. 한국을 휩쓸고 있는 투자 열풍 진단에서 출발해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여성학, 심리학, 철학, 교육학, 예술학 등 열 편의 글을 실었다. 개별적인 경험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가운데, 내가 성장할 길 또는 사회 변화의 길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