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당신 곁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

흔들리는 꽃망울에게 보내는 정여울 작가의 따뜻한 인문학 편지,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이언 매큐언의 소설『칠드런 액트』를 같이 읽어요. 순수한 아이의 열정은, 그 스스로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것이 될 수도 있겠어요. 
 
사진  이승원

내 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난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며 인연을 끊어버린다면? 그 무서운 고립감과 홀로 버려진 느낌을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고, 총총히 돌아서서 자신의 길을 가버린다면?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그 사람 하나뿐인데. 바로 그 사람이 ‘나는 너를 잘 알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이제 나에게 절대 연락하지 말라며 떠나버린다면. 그 당혹스러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열일곱 살 소년 아담은 바로 그런 막막한 상황에 처한다. 피오나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아담은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지만, 피오나는 ‘판사로서의 자신’을 앞세운다. 항상 모범적인 삶을 살아오던 피오나로서는 아담의 돌발 행동을 받아주기가 어려웠다. 자신을 판사가 아닌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아담을 설득하는 피오나의 모습은 전형적인 ‘어른’의 모습이다.
피오나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가지 않았을까. 너는 어린아이야, 너와 나는 사적인 관계로 연결될 수 없어, 나는 판사로서 너의 ‘복지’를 생각한 것이지 너를 ‘남자’로 생각할 순 없어. 그 모든 생각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합리적이고 옳은 결정이다. 하지만 아담은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는다. 자신이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린 첫 번째 사랑의 화살이 빗나간 것이다.

소설 『칠드런 액트』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포스터
 

피오나에게는 남편이 있다. 말썽꾸러기이긴 하지만. 아내 피오나가 일에 푹 빠져 자신과 데이트를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 잭은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곤 집을 나가버린다. 당신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허락을 받고 연애를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선언을 하는 남편. 업무의 압박 속에서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살아가는 아내 피오나에 대한 연민조차 없어 보이는 남편 잭.

그는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다.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동법 전문 판사로서 무엇이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인지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아내의 아픔을 보살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피오나는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집을 나가버린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 때문에 더욱더 외로워진다. 

 
아담의 존재는 그녀의 마음에 미묘한 파동을 가져온다. 누군가 자신을 너무도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부담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안타깝다. 단지 ‘고통받는 청소년, 우리 어른들이 보호해야 할 미성년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담은 피오나에게 분명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아담을 바라보며 피오나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새롭게 되돌아보게 된다. 피오나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 생각해 온 그 수많은 금지의 경계선들을 아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는 피오나에게, 아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이리저리 검색해 보면 결국 나온다고. 게다가 뉴캐슬까지 자신을 몰래 따라온 아담을 바라보며 피오나는 충격을 받는다. 내가 뉴캐슬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는 피오나의 질문에, 아담은 또 수줍어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한다. 기차역에서부터 판사님을 따라갔다고. 
 
이 아이가 자신을 순수한 마음으로 동경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피오나는 두렵다. 이 아이의 순수한 열정이 자신의 단단한 성벽 같은 삶을, 점점 무너뜨릴까 두렵다. 피오나는 아담의 그 대담함과 저돌성을 받아주기 어려웠다. 평생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피오나의 철통같은 모범적 삶을, 아담은 처음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살아가는 아내 피오나에 대한 연민조차 없어 보이는 남편 잭. 
 

게다가 아담은 피오나로서는 결코 허락해 줄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을 하고 만다. 판사님 곁에 있고 싶다고. 판사님이 결혼한 분이란 것도 아는데, 두 분의 집에 같이 살고 싶다고. 아담은 피오나를 알고 싶었고, 피오나의 곁에 있고 싶었고, 피오나의 아침과 저녁을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피오나 부부의 집에 하숙하면서, 나중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하숙비도 내겠다는 아담. 이쯤 되면 독자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담은 보호자를 원하는 것일까, 스승을 원하는 것일까, 연인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원하는 것일까.

아담의 그 어처구니없는 순수함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만다.

아직 사회적 인습과 제도의 무서움을 모르는 아담은, 피오나가 감당할 수 없는 부탁을 함으로써 그녀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다. 피오나는 이 아이의 열정을 조금이라도 받아주는 순간 자신의 삶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아담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아이를 보호하는 어른의 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자들도 그것만은 알 것 같은데, 피오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만 시험하는 아담을 외면해버린다. 피오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의 관심과 친절을 원하는 이 가여운 소년을 향해 차갑게 선언한다. 부모님께 연락하라고, 이제 이곳을 떠나라고, 넌 가야 한다고.

아담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서며,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으로 억지로 등을 떠밀리며, 피오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 자신이 영원히 거절당한 존재임을 이 열일곱 살 청년도 깨달은 것이다. 아담은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그리고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분명 남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피오나에게 키스하고 만다.

아담은 보호자를 원하는 것일까, 스승을 원하는 것일까, 연인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원하는 것일까.
 

 
가볍게, 피오나는 아담의 얇은 재킷 옷깃을 손가락으로 끌어당겼다. 볼에 입을 맞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위로 다가가고 아담이 살짝 몸을 숙여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그가 고개를 돌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물러설 수도 있었다. 뒷걸음질 쳐서 바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 대신 피오나는 무방비 상태로 순간에 머물렀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감촉이 선택의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입술을 완전히 맞댄 채로 담백한 키스가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한순간의 접촉이지만 키스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 어머니가 장성한 아들에게 하는 입맞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초 정도, 아니 어쩌면 삼 초 정도의 접촉. 말랑한 입술의 부드러움 안에서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모든 세월, 모든 삶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 그러다 서로에게서 물러났을 때, 그렇게 가벼이 살을 맞댄 순간이 두 사람을 다시 가깝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자갈마당과 돌계단을 지나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피오나는 그의 옷깃을 놓고 다시 말했다. “넌 가야 돼.”
 
 
ⓒ 정여울, 2021. 
 다음 편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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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정은
    2021.6.9 2:53 오후

    이번 책은 유난히 더 흥미로운 것 같아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