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잤을 때

 

 

감염병에 대항하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한편 5호 ‘일’ 출간과 함께 ‘일과 삶’을 주제로 레터를 보내 드려요. 오늘은 알베르 카뮈의『페스트』를 같이 읽어 봅시다. 따분할 정도로 특별한 데 없는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유행하고 봉쇄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혼란과 공포, 회피와 부정, 무관심과 체념 등 여러 반응을 보여 줍니다. 의사인 주인공 리유는 도시의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페스트에 맞서는, 끝없는 과로의 길로 들어섭니다. 돈도 보람도 기대하기 힘든 이 절망의 시간 속에서, 그를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9월과 10월 두 달 동안,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자기 발밑에 꿇어앉혀 놓았다. 본래 제자리걸음밖에 할 수 없었기에, 인간들 수십만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그 여러 주일의 세월 동안에도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안개와 더위와 비가 차례로 하늘을 가득 채웠다. 10월 초에는, 억수 같은 소나기가 거리를 깨끗이 쓸었다. 그리고 그동안 줄곧 그 기막힌 제자리걸음 이외에 더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생긴 것이 없었다.

그때 리유와 그의 친구들은, 어느 정도로 자기네들이 지쳐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보건대 사람들은 더 이상 그 피로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의사 리유는 자기 친구들과 자기 자신의 태도에서 이상야릇한 무관심이 커 가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서, 여태껏 페스트에 관한 모든 뉴스에 대해서 그렇게도 깊은 관심을 보여 주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랑베르는 얼마 전부터 자기가 있는 호텔에 설치된 예방 격리소의 관리를 임시로 맡고 있었는데, 자기가 담당하는 사람들의 수효를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병세가 나타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만들어 놓은 즉각적인 퇴거 절차에 대한 가장 세세한 사항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예방 격리자들에게 미치는 혈청의 효과에 관한 통계는 그의 머릿속에 아주 잘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페스트 희생자의 주간 통계 수치는 알지 못했고, 실제로 페스트가 더 심해지고 있는지 물러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머지않아 기어코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로 말하면, 그들은 밤낮으로 자기네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 신문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혹 누가 어떤 결과를 알려 줄라치면 거기에 흥미가 끌리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딴 데 정신이 팔린 채 무관심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그것은, 고역에 지칠 대로 지쳐서 그저 일상적인 자기 일에 과오나 없으면 그만으로 여기다 보니 결정적인 작전도 휴전의 날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 대규모 전쟁의 전투원에게서나 상상할 수 있는 무관심이었다.
또 다른 의사 카스텔로 말하면, 그가 리유에게 혈청이 다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왔던 날, 때마침 새로 병원에 찾아온, 리유가 보기에도 증상이 절망적이었던 오통 씨의 어린 아들에게 그 첫 시험을 해 보기로 결정한 다음 리유가 그 늙은 친구에게 최근의 통계를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그때 리유는 상대방이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서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평소에는 어딘지 부드러우면서도 신랄한 일면 때문에 영원한 청춘이 느껴지던 그 얼굴에 갑자기 맥이 풀리고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침이 한 줄기 흐르면서 피로와 노쇠가 드러나는 것을 보자 리유는 목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약해진 면을 보고, 리유는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의 감성이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에 맺히고 딱딱해지고 메말라 있던 감수성이 때때로 풀어져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리유를 몰아넣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딱딱한 상태 속에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매듭을 다시 한번 단단히 졸라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계속 견뎌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환상을 많이 품지도 않았고, 또 피로 때문에 품고 있던 환상마저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 중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이미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보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내라는 여자들은 그의 손목을 쥐고 울고불고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는 살려 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참 인정이 없군요.”하고 누군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꼭 그만큼의 인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의 인정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 주기에 충분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날마다 자기가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정보뿐이었다. 물론 그런 것을 사람의 맡은 바 직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대체 그 공포에 휩싸이고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그 군중 틈에서, 누가 인간의 직분을 수행할 만큼 여유가 있단 말인가? 피곤하기라도 한 것이 차라리 행복이었다. 만약 리유에게 더 힘이 있었다면, 도처에 퍼져 있는 그 죽음의 냄새는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을 것이.
그러나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잤을 때, 사람이 감상적이 될 수는 없다. 만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즉 정의의 눈으로, 끔찍하고 바보 같은 정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즉 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역시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페스트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그는 구세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알약 세 개와 주사 한 대면 모든 것을 다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팔을 붙들고 복도까지 따라 나왔다. 그것은 흐뭇한 일이었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와 반대로, 그가 병정을 데리고 가서 개머리판으로 문을 두드려야 가족들은 문을 열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리유를, 그리고 인류 전체를 자기네들과 함께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아! 정말이지 인간은 다른 인간들 없이 지낼 수는 없고, 정말이지 그도 이제는 저 불행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의 신세이고, 정말이지 그들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역시 가슴속에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 동정심의 전율과 똑같은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런 인간인 것이었다.
적어도 그러한 것이, 그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여러 주일 동안 의사 리유가 자기의 생이별 상태에 관한 것과 더불어 마음속에 끓이고 있었던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의 친구들의 얼굴에도 그림자로 비쳐서 나타나는 그런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재앙에 맞서서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차츰차츰 밀려들고 있는 탈진 상태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정서 같은 데에 대한 무관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는 무성의에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당시 절대로 불가결한 것이 아닌 동작, 또 그들에게는 항상 힘에 겨운 듯이 보이는 모든 동작을 애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 사람들은 점점 더 빈번하게 자기 자신들이 규정해 놓은 위생 규칙을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들 몸에 실시하기로 했던 수많은 소독 규칙을 잊어버렸으며, 때로는 전염에 대한 예방 조치조차도 취하지 않고 폐장 페스트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들어가기 직전에 자기는 이제 곧 감염된 집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도, 어떤 정해진 장소까지 되돌아가서 필요한 소독약을 몸에 뿌린다든가 하는 일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페스트와의 투쟁이 도리어 사람들을 페스트에 걸리기 가장 쉽게 해 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요행에 운명을 걸고 있었던 셈인데, 요행이란 누구도 바랄 수 없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에서

매일 스무 시간을 병상에서,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보는 만큼의 인정이 남은 리유처럼, 감당할 수 없는 피로를 견디고 있는 ‘코로나의 의인’들이 누군가에게 인정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지구 어딘가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요.    

 

가장 위험한 것은 각자 해야 할 일에 무성의해지는 데 있다는 말이 지금도 적용될 것 같아요. 꼭 의료진이거나 관련 업무를 하고 있지 않더라도, 개인 방역 수칙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역사적으로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발생했던 페스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유럽인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1350년 전후일 텐데요. 이때 페스트가 기승인 도시 피렌체를 떠나 교외 별장으로 피신한 젊은이 열 명이 풀어 놓은 대담한 이야기 『데카메론』과 『페스트』를 나란히 읽어도 재밌겠어요. 각각 페스트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죽음을 목도한 뒤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와 『페스트』를 쓴 카뮈의 같고 다름을 생각하면서요.
 

1947년, 『페스트』가 프랑스에 출간되었을 때, 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출간 즉시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었고, 그해의 ‘비평가상’의 수상작으로 결정되면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페스트라는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의연히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룬 『페스트』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이 남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현재까지 외국어 번역을 제외하고 오로지 프랑스어 판만으로 약 500여만 부가 판매되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언젠가부터 거리로 나와 비틀거리다 죽어 가는 쥐 떼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부 당국이 페스트를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자 무방비 도시는 대혼란에 빠진다. 무서운 전염병이 휩쓰는 가운데 고립되어 버린 도시에서는 재앙에 대응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 묘사된다. 사실상 『페스트』 착상의 기폭제가 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다. 페스트, 즉 죽음과 맞서 싸우다 죽어 간 사람들, 그에 맞서 싸워 이겨 낸 사람들, 희망과 기쁨 속에서 맞보는 고통과 절망. 결국 그 근원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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