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거지에게 줄 것은 월요일밖에 없어

 

 

발자크의 막말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한편 5호 ‘일’ 출간과 함께 ‘일과 삶’을 주제로 레터를 보내 드려요.  

첫 번째 레터는 ‘현대 소설의 창시자’로 불리는 19세기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글을 가져왔어요.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의 목격자로서 대도시의 속성을 낱낱이 밝혀 낸 발자크는 「우아하게 사는 법」에서 현대인의 삶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데요. 바쁜 삶, 예술가의 삶, 우아한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새로운 도시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발자크는 과연 현대인의 삶을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도시의 노동자들은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날 현대 풍속은 세 계층의 인간을 만들어 냈다.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바로 여기에서, 보헤미안의 시적이고 자유분방한 소설에서부터 입헌 군주들의 단조롭고 지루한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삶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세 개의 존재 방식이 생겨난다.
즉, 바쁜 삶, 예술가의 삶, 우아한 삶.

바쁜 삶이라는 주제에는 변주가 없다. 이제 끊임없이 열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 인간은, 제 운명을 포기하고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박애심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만이 찬탄을 자아낸다. 인간은 도처에 등장하는 거대한 돌덩이들을 점점 더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것을 쌓아올린 사람들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그저 그들을 연민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건축은 여전히 어떤 위대한 사상의 표상으로 보이지만, 노동자들은 돌을 들어 올리는 윈치나 외바퀴 손수레, 삽, 곡괭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것이 불공평한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노동의 도구로 재편된 인간은 증기기관처럼 동일한 형태로 생산되며, 개인적인 의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도구-인간은 일종의 사회적인 제로(0)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최대한 많이 모은다 해도, 그들 앞에 다른 숫자가 붙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사회적 총계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다.
농부, 석공, 군인은 같은 덩어리의 고른 조각이자 같은 원의 부분이며, 손잡이만 다른 연장이다. 그들은 해와 더불어 자고 해와 더불어 일어난다. 농부와 석공은 수탉의 울음소리에, 군인은 기상나팔 소리에 잠에서 깬다. 군인에게는 가죽 반바지와 싸구려 시트 그리고 장화가, 농부와 석공에게는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인 누더기가 제공된다. 그들 모두에게는 아주 거친 음식들만 주어진다. “회벽을 치거나 사람들을 때리거나, 강낭콩을 수확하거나 칼을 휘두르거나……” 이것이 사시사철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일컫는 수사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죽는 날까지 답을 찾아 헤매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대개 그들의 지루하고 슬픈 삶은, 기껏해야 작은 나무 의자를 하나 얻어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딱총나무 아래 자리한 초가집 문간에 그것을 내놓고 앉아 쉬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물론 제복을 입은 하인에게 다음과 같은 불호령을 듣는 두려움에서는 놓여나겠지만 말이다.
“이 양반아, 썩 꺼지지 못해! 거지한테 줄 거라곤 월요일밖에 없어!”
이 모든 불행한 사람들의 삶은 뒤주 속에 얼마만큼의 빵이 있는가에 의해 좌우되며, 삶의 우아함은 궤짝 속에 어떤 누더기가 있느냐로 결정된다.
 

소매상인, 위관급 장교, 하급 관료는 이들보다는 조금 나은 삶을 살지만, 그들의 삶 또한 저속한 특징을 보인다. 메커니즘만 조금 더 복잡해졌을 뿐 그들 또한 늘 노동에 매여 있고, 윈치와 다르지 않으며, 지성은 그들의 삶에 아주 약간만 개입된다.
그들에게 재단사란 일종의 예술가가 아니라 언제나 가혹한 청구서를 독촉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그들은 셔츠에 칼라를 붙였다 뗐다 하는 습관을 가졌으며, 채권자들(재단사)이 재산을 몽땅 도둑맞는 상상을 하고는 자책한다. 평소에는 삯마차를 이용하지만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갈 때는 마부 딸린 마차를 빌린다.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모으지 못한다면, 꿀벌 같은 그들의 삶에 희망이란 노후를 대비해서 음식과 거처를 확보하는 것 이상은 못 될 터다. 부슈라(Boucherat)가에 위치한 건물 5층에 냉골 같은 방 한 칸 가진 것이 고작인 그들에게는, 이를테면 아내에게는 기껏해야 두건 달린 외투와 가공하지 않은 퍼케일로 만든 장갑이, 남편에게는 회색 중절모와 작은 잔에 담긴 커피 한 모금이, 아이들에게는 생드니(Saint-Denis) 학교에서의 교육이나 반액 장학금이, 그리고 모두에게 일주일에 두 번, 다진 파슬리를 곁들인 삶은 고기 정도만이 허락될 뿐이기 때문이다. 0도 아니고 완전한 숫자도 아닌 이 사람들은, 아마도 소수점 이하의 숫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옥 같은 서글픈 거주지에서, 삶은 연금이나 약간의 공채 금리에 좌우되며, 우아함은 술이 달린 장식 휘장이나 배처럼 양 끝이 위로 들린 침대, 유리병 모양의 촛대에 의해 결정된다.
커다란 건물 위로 늘어진 밧줄에 낀 이끼처럼, 사람들은 위태롭게 흔들리면서도 사회적 사다리 위를 향해 분주하게 기어오른다. 몇 단을 더 올라가면 의사, 사제, 변호사, 공증인, 사법관, 도매상인, 시골 귀족, 중간 관료, 영관급 장교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화려하고 명예로운 휘장 아래서 세심하게 닦이고 조여지고 기름칠된 펌프나 체인, 추(錘) 등을 거느리고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기계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늘 요동치고 있을 뿐, 자유롭지도 풍요롭지도 않다. 이 신사들은 매일 수첩에 기록된 수많은 문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 작은 수첩은 과거 학교에서 그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감독관 대신, 자신들이 왕보다 천 배나 더 변덕스럽고 배은망덕한 어떤 이성적 존재의 노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들이 휴식을 취할 나이가 되면, 유행에 대한 감각은 떨어지고 우아한 시절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들을 실어 나르는 마차는, 용도가 다양한 돌출 발판을 옆구리에 거느린 채, 저 유명한 포르탈의 마차처럼 낡아 간다. 그들의 집은 여전히 캐시미어로 치장되고, 부인들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귀고리를 달고 산다. 그들의 사치는 언제나 그렇듯 저축과 같은 성격을 띤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사치스럽고, 저택 정면의 회랑 위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용건은 문지기에게”. 만일 그들이 숫자로 표시되어 사회적 총계에 합산된다면, 그들은 단순히 단위를 차지할 뿐이다.
이 계급 구성원들의 삶은 남작 칭호에 의해 좌우되고, 우아함은 멋진 깃털 장식을 한, 키 큰 사냥 시종이나 페도 극장의 칸막이 좌석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까지가 바쁜 삶이다. 고급 공무원, 고위 성직자, 장성, 대지주, 장관, 시종과 왕족들은 무위(無爲)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들어가며 우아한 삶을 영위한다.

 

어느 철학자는 사회 집단에 대한 이 슬픈 분석을 마치면서, 마치 뱀을 보기라도 한 양 사람들이 서로 몸을 피하게 하는 수많은 편견에 상당한 혐오감을 느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나는 임의로 어떤 나라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뿐이니…….”
이처럼 구획된 우리 사회에 대한 개관은, 다음과 같은 첫 아포리즘의 태동에 도움을 주리라.
1 문명적이든 원시적이든, 삶의 목적은 휴식이다.
2 절대적 휴식은 권태를 낳는다.
3 넓은 의미에서 우아한 삶은 휴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술이다.
4 일에 길들여진 인간은 우아한 삶을 이해할 수 없다.
5 결론. 우아해지기 위해서는 일을 거치지 않는 휴식을 향유할 줄 알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백만장자의 아들이거나 왕족이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한직에 있거나, 부정하게 겸직하거나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우아한 삶에 대한 정의를 빠뜨린다면 이 시론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정의를 내리지 않는 시론은 두 다리가 잘린 장교와 같다. 그 장교는 간신히 움직일 뿐이다. 정의를 내리는 것은 요약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요약해 보도록 하자.
우아한 삶이란 외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완성이자 돈을 지적으로 소비하는 기술이다. 또는 모든 것을 남들처럼 하면서도 어떤 것도 남들처럼 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속에서 우리가 본래 가진 매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좀 더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내 재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친애하는 우리의 친구 A-Z에 따르면 귀족의 고결함을 물건 속으로 옮기는 것이다.
P. T. 스미스에 따르면 우아한 삶이란 산업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이다.
자코토 씨는 우아한 삶에 대한 시론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텔레마코스의 모험(Télémaque)』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쿠쟁 씨의 말을 들어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고상한 사유의 질서 속에 있다. 이성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감각, 상상력, 마음의 사용을 동반한다. 그것은 원초적 직관, 동물성의 즉각적인 계시와 섞이면서 직관과 이성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인다.
생시몽의 이론에 따르면, 큰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우아한 삶이란 하나의 사회가 걸릴 수 있는 가장 큰 질병이다.
쇼드릭은 “우아한 삶이란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한 천 조각이다.”라고 말했다.
우아한 삶이란 물론 우리의 세 번째 아포리즘(“넓은 의미에서 우아한 삶은 휴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술이다.”)을 에둘러 표현한 이 하위의 정의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우아한 삶은 좀 더 중요한 질문들을 함축한다. 우리가 선택한 ‘요약’이라는 방식에 충실하기 위해 논의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

 

사회가 존재한 이래 정부라는 것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체결된 늘 필요한 하나의 계약이었다. 이른바 몽고메리식 배분에서 야기된 이러한 내적 투쟁은 문명인들에게 재산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재산은 모든 사적인 야심을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처지에 놓이지 않겠다는 욕망에서 노블레스, 귀족 계급, 특권 계급, 상류 사회로 편입하려는 남녀들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보물 따먹기 기둥’으로 보고, 그 기둥의 2분의 1, 3분의 1, 4분의 1이라도 차지하고자 하는 이러한 종류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과도한 이기심과 허영심을 야기한다. 그러나 허영심이란 매일 나들이옷을 입는 일에 불과하므로, 인간은 저마다 광장의 행인들에게 보여 줄 목적을 지닌 하나의 기호를 자기 권력의 표본으로 가질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이 속한 광장에서 거대한 보물 따먹기 기둥 위에 올라앉아 있고, 기둥 꼭대기에서는 왕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귀족 가문의 문장(紋章)들, 같은 색의 옷들, 모자, 긴 머리, 풍향계, 뒤축이 높고 붉은 구두, 굴뚝의 갓, 탑 형태의 비둘기 집,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각형 방석,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향, 귀족의 성 앞에 붙이는 전치사 de, 리본, 호화로운 머리띠, 얼굴에 붙이는 애교점, 립스틱, 권위를 나타내는 관, 끝이 뾰족하게 쳐들린 구두, 챙 없는 둥근 모자, 법관들이 걸치는 긴 옷, 다람쥐 모피, 진홍색 천, 뒤축에 붙이는 박차 따위는 많든 적든 간에 한 인간이 차례로 취할 수 있는 휴식의 물질적 표식, 또는 그가 만족시킬 권리가 있는 일시적 욕망이 되었고, 낭비할 수 있는 사람, 돈, 생각, 노고가 되었다. 그리하여 행인들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위도식하는 자와 일하는 자, 쓸모 있는 자와 쓸모없는 자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난 혁명이 14세기 동안 만들어진 이 모든 의상을 폭력적으로 낚아챈 뒤 지폐로 만들어 버렸고, 이러한 변화가 나라 전체를 휩쓸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를 몰고 왔다. 바쁜 삶을 사는 사람들(노동자)은 혼자 일하는 데 진저리가 났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놀고먹기만 하는 보잘것없는 부자들과, 고통과 이득을 균등하게 나누기로 결정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 투쟁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위도식하게 되자마자, 이 체제에 가장 열광했던 자들이 체제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전복적이고 위험하며 불쾌하고 불합리하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사회는 재정립되었고, 남작과 백작 등의 귀족 칭호가 다시 붙여졌으며, 몸은 새로운 띠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문장의 진주 장식이 했던 임무를 이제는 수탉의 깃털이 이어받아, 불쌍한 민중에게 “사탄아 물러가라!(Vade retro, Satanas!)”라는 말을 외칠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속물 같은 부르주아 놈들아 물러가라!(Arrière de nous, PÉQUINS!)” 매우 철학적인 나라인 프랑스는 이 마지막 시도를 통해 국민들이 세운 옛 체제의 정당성, 유용성, 안정성을 실험한 후 몇몇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원래의 원칙으로 돌아왔다. 그 원칙이란 하나님이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 계곡, 산, 참나무, 풀 들을 생겨나게 한 원칙과 같다.
 
서력 1120처럼 1804년에도 한 남자 또는 여자가 동포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나는 저들보다 위에 있고 저들에게 부유함을 뽐내고 저들을 보호하며 저들을 지배한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지배하고 보호하며 그들에게 부유함을 뽐내고 있음을 잘 안다. 왜냐하면 부유함을 뽐내고,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배하는 자는, 뽐내지 못하고 보호받고 지배받는 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먹고 마시고 자고 기침하고 옷을 입고 생활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아한 삶이 갑자기 나타났다.
우아한 삶은 “나는 과시하고, 보호하고……” 등의 완벽하게 도덕적・종교적・군주제적・문학적・헌법적・자기 본위적인 독백에 의해 매우 화려하고 새롭고 오래되고 오만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지지・수정・증대・소생된 모습으로 발전한다. 왜냐하면 재능과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행동하고 살아가는 원칙은 통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원칙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통속적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아한 삶은 본질적으로 태도의 과학이다.
이제 질문은 충분히 정리된 것 같다. 이 질문은 라베즈 백작이 제1 의회의 임기를 7년으로 정할 때 했던 것처럼 섬세하게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부류가 우아한 삶을 시작할 것이며, 모든 한가한 자들에게 그 원칙을 따를 능력이 있는가?
여기에 모든 의심을 풀어 줄 두 개의 아포리즘이 있다. 그것은 우아함과 품위를 관찰하는 출발점이 되리라.

7 우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켄타우로스나 2인승 2륜 경마차인 틸버리를 소유한 인간처럼 완벽해야 한다.

8 우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거나 부자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이전에 솔론이 말했다. 왕자가 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왕자인 체하지 말라고.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봉만·박아르마 옮김,
『현대 생활의 발견』에서

발자크…… 거지에게 줄 것은 월요일밖에 없다라…. 뭐 공휴일을 앞두고 있는 저에게는 별 타격 없네요.  내일 정승처럼 돈 쓰며 놀기로 한 휴일 계획이 우아한 것인지 고뇌에 빠지고 있어요.

“그들에게 노동은 죽을 때까지 답을 찾아 헤매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이 구절을 보니 이번 시즌 저의 콘셉트를 아무래도 너무 무겁게 잡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퇴근 좋아하는데…… 책도 가끔 좋아하는데…. 노동에 관한 어지간한 신랄한 말은 발자크가 다 했으니, ‘근면 혁명’으로서의 산업 혁명 때와는 다른 2021년의 이야기를 덧붙여 갈 수밖에요. 

저도 “거지에게 줄 거라곤 월요일밖에 없어!”에서 쓰러지고 말았어요. 노동자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저주……월요일…… 한편 발자크의 신랄한 문장들을 읽으면서 행인들의 시선조차 신경쓰지 않은 저의 오피스룩을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우아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아해지기 위해서는 백만장자의 자식이거나 복권에 당첨되야 한다’는 발자크의 막말에 푸하핫 웃다가도 어쩐지 우울해지는 건 제가 바로 ‘바쁜 삶’을 사는 노동자이기 때문이겠죠? 아프거나 지치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목표가 되야 할 것 같아요. 그게 곧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될 수도 있겠고요! 
우선 오늘은 이만 좋아하는 퇴근을 해 보겠어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현대 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의 섬세한 관찰력과 명쾌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에세이 『현대 생활의 발견』. 한평생 9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발표하며, 「인간 희극」이라는 장대한 규모의 총체적 문학을 기획하였던 발자크는, 이른바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 이후 새로이 출현한 현대 사회와 대도시 문명, 그 속에서 부대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 군상, 욕망과 환멸의 풍경을 모조리 그려 내고자 하였다. 본래 발자크는 아버지의 소망, 혹은 강요에 못 이겨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좀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문예, 과학, 심지어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관심을 보이며 문청의 삶을 꿈꾼다. 마침내 습작 생활에 매진하며 작가의 길로 나서지만, 정열적이고 성마른 성격 탓에 일확천금을 좇기 일쑤였고 급기야 수차례 사업을 망치면서 큰 빚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윌리엄 셰익스피어, 장자크 루소, 월터 스콧 등 거장들의 작품을 동경하며 걸작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방대한 관심사와 야망을 밑천으로 틈틈이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훗날 대작들의 청사진을 하나하나 그려 나간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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