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의 아름다움

흔들리는 꽃망울에게 보내는 정여울 작가의 따뜻한 인문학 편지, 정여울의 블루밍 레터입니다. 혹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다고,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고 자책한 적 있나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눈부신 시간의 아름다움을 맘껏 누려 보세요. 이 편지를 읽으며, 함께 『모모』의 시간을 가져 봅시다. 
 
사진  이승원
여기서는 단 한순간, 단 1센티미터까지 모든 것이 정확하게 계산되고 계획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미하엘 엔데, 한미화 옮김, 『모모』에서
 
당신의 인생은 헛되이 낭비되고 있다
모모로 인해 행복의 비법, 시간과 축제를 벌이는 법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에게 뜻밖의 재난이 들이닥친다. 그것은 바로 저 유명한 ‘회색 신사들’의 출현이다.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친다. 당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거의 모두 시간 낭비였다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당신들은 아주 하찮고 부질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자신들에게 시간을 맡기라고. 회색 신사들이 관리하는 시간은행에 시간을 맡기면 우리들이 당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여 당신들을 시간의 부자로 만들어드리겠다고. 
 
이 지역의 존경받는 이발사 푸지 씨에게 접근하여 ‘당신의 인생을 철저히 낭비되었다고’고 주장하며 그를 회유하는 회색 신사의 교묘한 술책. 그 장면을 다시 읽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푸지 씨, 그는 바로 우리 곁의 소박하고 정겨운 이웃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회색 신사는 푸지 씨에게 접근하여 우리 시간은행에 당신의 시간을 모두 맡기라고 유혹한다. 당신은 철컥거리는 가위질 소리, 손님들과의 쓸데없는 잡담, 손님을 면도해 주기 위한 비누거품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당신이 죽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당신의 인생은 헛되이 낭비되고 있으므로, 그 모든 시간을 시간은행에 저축하면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루 24시간을 쪼개 보면, 당신이 잠을 자는 8시간, 당신이 노동하는 8시간, 밥을 먹는 데 보낸 2시간, 귀가 어두워서 거의 듣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1시간, 쓸데없이 키우고 있는 앵무새에게 낭비하는 15분까지, 당신은 마흔두 살이 된 지금까지 무려 1,379만 7,000초를 낭비했다고. 심지어 집안일을 하는 시간,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 책을 읽는 시간까지 합하면, 당신은 평생을 낭비해왔다고.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시간을 모두 없애면
뭔가 이상하다. 이 모든 시간은 푸지 씨에게 소중한 시간들이었는데. 회색 신사는 푸지 씨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었던 모든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다리아 양에게 매일 꽃 한 송이를 선물하기 위해 30분간 그녀를 방문하는 일. 그것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그 꽃 한 송이를 받으며 푸지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동안 순수하게 기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중한 시간마저 시간은행에 저축해야 한다는 회색 신사의 꾀임에 푸지 씨는 넘어가고 만다. 나의 인생이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기혐오의 감정이 시간은행의 문지기들, 회색 신사들의 검은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 아닐까. 자신의 삶이 있는 그대로 멋지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모모에게만은, 회색 신사의 마수는 뻗치지 못했다. 회색 신사는 푸지 씨를 유혹한다. 하루에 두 시간씩만 우리 시간은행에 저축해 보라고. 
 
“앞으로 20년간 두 시간씩을 저축하신다면 1억 512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모이는 겁니다. 당신은 예순두 살이 되시는 해에 그 재산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자까지 붙여 인생의 시간을 터무니없이 부풀려준다는 회색 신사의 농간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푸지 씨는 마침내 그동안 시간을 저축하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며 자책한다. 
 
“맞아요! 정말 유리한 제안이군요. 일찌감치 저축을 시작해야 했는데. 난 정말 멍청이예요. 이제야 눈이 뜨이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정말 절망스럽습니다!”
시간을 쪼개서는 얻을 수 없는 향기
회색 신사는 명령한다. 불필요한 시간은 모두 생략하라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시간, 당신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느라 낭비하는 모든 시간을 없애버리라고. 따스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우리의 푸지 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늙은 어머니는 요양원으로 보내버리고, 다리아 양에게 꽃 한 송이를 바치는 시간도 없애버리고, 책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며, 견습생들을 닦달하고 더 열심히 일하라고 강요하며 감시하는 무시무시한 푸지 씨로 변해 버린다. 
 
그렇게 모모네 마을 사람들은 오직 모모를 제외하고 회색 신사의 노예들로 변신한다. 하지만 시간의 향기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아끼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다. 시간의 향기, 시간의 아름다움, 시간 속에서 느끼는 행복.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눈부신 축복이기에.
 
그는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안정을 잃어 갔다.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 썼지만 손톱만큼의 자투리 시간도 남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은 수수께끼처럼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의 하루하루는 점점 더 짧아졌다.
담벼락과 광고판에는 온갖 행복의 청사진이 담긴 포스터가 붙여졌다. 포스터에는 이를테면 번쩍번쩍 빛나는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시간 절약. 나날이 윤택해지는 삶!

 

    시간을 아끼면 미래가 보인다!

 

    더욱 보람찬 인생을 사는 법 - 시간을 아끼라!

─미하엘 엔데, 한미화 옮김, 『모모』에서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
모모는 모두가 회색 시간의 노예로 전락하자 자신이 그 모든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을 거쳐 마침내 모모가 대적하게 된 회색 신사들의 실체는 오직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욕망이었다. 폐허가 된 원형극장으로 오직 모모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던 사람들은 원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모모에게 가 보게!” 
 
들고 지칠 때면, 오직 우리의 말을 따스하게 들어주는 모모의 천사 같은 눈빛과 활짝 열린 귀가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 사람들은 행복의 비결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모와 함께하는 시간마저 회색 신사들의 시간은행에 헌납해버렸던 것이다.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는 부모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뿐 아니라 영혼까지 잃어버린 어른들. 그들은 모모가 회색 신사들의 마법으로부터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해낼 때까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되찾는 ‘모모의 시간’.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자들의 여유, 지금 이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은 자들의 눈부신 충만함으로 가득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점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 그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효율과 비효율을 넘어선,
나를 위한 시간
나도 한때는 회색 신사처럼 시간을 ‘효율적인 시간’과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나누어, 24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계산적인 시간관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시간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은 늘 그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찾아오곤 했다. 열정페이를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의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가’라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내 시간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의 가혹한 냉대에 가슴 아파하곤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기나긴 열정페이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 한 시간보다는 그 모자란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한 줄이라도 더 책을 읽으려고 했던 나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발견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밤 열두 시가 넘었지만, 그 시간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소설책을 읽고, 철학서를 읽고, 인문학 공부와 관련된 그 모든 ‘쓸데없어 보이는, 비효율적인 시간’에 내 인생을 걸었다. 바로 그 소중한 ‘나를 위한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열정페이 시절의 그 가망 없는 노동에 나를 완전히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만약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색 신사들의 꼬임에 넘어갔다면, 더 많은 임금과 더 그럴듯한 명함을 내밀며 ‘너의 시간은 낭비되고 있다’고 속삭이던 우리 시대의 회색 신사들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글 쓰는 사람 정여울’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토록 소중한 순간들, 남들이 볼 때는 자칫 ‘쓸데없이 흘려보낸 시간’으로 보일지라도 오직 나만은 그 시간을 눈부시게 불태웠던 순간들을 ‘모모의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 최고의 소중한 이야기라도 되는 듯 열심히 들어줄, 우리의 영원한 수호천사 모모. 그토록 사랑스러운 모모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내 소중한 시간의 양탄자를 한 땀 한 땀 짜고 있다.
의심 없이 이 삶을 껴안을 용기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소중한 존재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모모는 그렇게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미하엘 엔데, 한미화 옮김, 『모모』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가꾸어 가는 이 소박한 ‘모모의 시간’의 눈부심을 잠시라도 잊는다면, 회색 신사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서늘한 유혹의 손길을 내밀 테니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우리의 삶이,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도 필요 없이,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충만하고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나는 ‘모모의 시간’을 통해 시간의 꽃밭 위에서 마음껏 뛰노는 법을 배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텐트 아래서 늘어지게 한 잠자는 법도 배운다. 당신의 삶은 지금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당신이 회색 신사의 마법에 맞서는 ‘모모의 시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삶을 아무런 의심 없이 힘껏 껴안을 용기만 있다면.
 
(끝)
ⓒ 정여울, 2021.

취소

  1. 이다빈
    2021.5.26 2:01 오후

    작가님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며 눈물이 고이기도 했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최대한 잘 소화하고 싶어 읽고 또 읽으며 받아 적기도 했습니다.
    언론인이 되고 싶어 글을 읽을 때 뭐라도 얻어 가려 공부한다는 자세로 읽곤 하는데 생각의 근육이 마구 펌핑(?ㅎㅎ)된 듯합니다.
    요즘 최대 관심 키워드가 인간 실존, 삶의 목적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분 좋은 고민거리와 고민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