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누가 검은 고양이는 불길하다 하는가


알랭 바디우 읽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한편》 4호 ‘동물’과 함께 동물 그리고 인간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알랭 바디우의 매혹적인 산문을 들고 왔어요.  검정, 깜장, 흑색, 흑인, 어두운, 캄캄한, 암울한, 절망적인, 사악한…… 등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프랑스어 noir. 그중에서도 식물과 동물의 검은색을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한에서 식물 세계는 사실상 검은색을 알지 못한다. 모든 녹색의 미묘한 차이가 탐색되는 경이로운 바탕 위에서 식물 세계는 우리의 경탄하는 눈에 비친 색채의 절정이다. 꽃은 어디서든 진정한 색채를 드러내는 매혹적인 표지이며, 사람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능숙하게 개발해 낸다. 사람들이 탐색하는 것은 장미의 무한히 향기로운 잠재성, 튤립의 곧음, 난초의 세련된 희귀함, 감추어진 가난한 망자들에게 주어지는 국화의 헌화이니 이로 인해 “그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어 그들의 신비를 말리는/ 대지 속에서” 훨씬 더 나은, 약간은 생기가 도는 느낌을 얻는다.
 
식물 세계는 그 바깥에서 사막이나 높은 산들만이 그러하듯이 바다의 공간적 저항, 그 한정 없음에 응수한다. 식물 세계는 아마도 그 애매한 후손에 비해 더 나은 가치를 지닐 테지만, 동시대 정치적 생태주의의 깃발이 되었다. 지금은 어디서든 민주주의적 의회에 녹색당이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런 방식으로 자연의 풍요로움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녹색당원에게 (당연히 아프리카인들의 피부색이 아니라, 무솔리니 지지자들이 입은 셔츠 색의 의미에서) 검다고 불리는 것보다 고약한 비방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식물이 비–검은색의 상징이자, 세계라는 게임판을 덮은 녹색 양탄자 위로 표출되는 색채에 의한 검은색의 배제라고 결론지어야 할까? 이런 의미에서 알렉상드르 뒤마는 유명한 소설에서 ‘검은 튤립’을 불가능한 것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 궁극적인 꽃을 역설적인 꽃의 이데아로, 요컨대 역사적으로 복잡한 네덜란드에서 주인공 모두가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적인 꽃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검정무만이 홀로 우리에게 주의를 줄 것이다!
 
실제로 검정무가 입증하는 것처럼 꽃, 줄기, 가지, 잎사귀의 진정한 본질은 그것들을 영양이 풍부한 토양에 고정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두어진 물이나 즙, 비옥한 의존적 결합 가운데 고정된 보호 박테리아와 버섯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그물망, 요컨대 땅속뿌리의 검은색에 고정시키기.
 
어느 날 땅에 떨어진 하나의 과일에서 자라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성장의 각 시기에 나무 자체만큼이나 크며 훨씬 단단하고 마디지고 잔뿌리로 가득 찬 땅 밑의 뒤얽힘을 통해 토대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거대한 나무, 가위벌들의 벌통, 우리 머리 위 저 멀리 보이는 태양의 진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녹색 바탕과 그곳에 있는 여러 색채의 땅 밑 이면에는 뿌리들의 검은 그물망이 자리하며, 검정무는 이 사실에 대한 작은 증언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빅토르 위고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도처에서 모든 생명이 요구하고 만들어 내는 감추어진 검은색을 찾는 확고한 본능에 이끌려, 빛의 도시 파리 아래 깊고 끈적끈적한 하수도를 재현해 냈다. 「사티로스(Le Satyre)」라는 시에서, 위고는 이러한 자연적 생명의 상징, 즉 신들의 빛의 비밀스러운 적을 그 상징과 식물 세계의 깊은 관계를 통해 나타낸다. 그는 땅속의 현실을 주의 깊게 살핀다. 덤불과 작은 숲에 한도 없이 매혹된 피상적인 화가들이나 장미에 대한 비평에 불과한 애가들과는 달리, 위고는 곧장 본질적인 것이 되는 사티로스를 향해 치고 들어간다.
 


사티로스는 깊은 구렁 속에서 생각하는 듯 보였는데
그가 그려 낸 것은 뿌리 쪽에서 본 나무,
암살적인 식물들의 땅속 전투,
불은 알지만 빛은 모르는 동굴,
창조의 어두운 뒷면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이른다! 식물의 본질적이고도 비밀스러운 검은색은 녹색당의 몽상과는 달리 땅속 식물의 분노를, 땅에 묻힌 살해를, 어떠한 빛도 이르지 못하는 식물의 검은 구멍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제공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뿌리 쪽에서 본 나무”를 그릴 줄 알아야 하며, 이는 당신을 곧바로 어머니 자연, 가이아 여신에 대한 유아기적인 우상 숭배가 아니라 “창조의 어두운 뒷면”으로, 푸르름을 생산물인 동시에 가면으로 두는 검은색으로 이끈다.
 
그 결과 위고는 내밀한 검은색의 조건 아래 “암살적인 식물들의 땅속 전투”에 익숙해진 식물의 세계가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아님을 이해할 능력을 얻는다. 식물 세계는 차라리 모든 탐욕스러운 포식의 농축이다. 목가적인 연회나 숲의 야유회 같은 것은 잊어버리자. 사티로스의 눈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땅의 검은색 속에서 탄생과 그 영구적인 버팀목에 충실한 식물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들은 빗물을 집어삼키고, 바람을 집어삼키는데,
밤, 죽음, 모든 것이 그것들에는 좋으며, 썩는 것은
장미를 보고 양식을 가져다줄 것이다.
탐욕스러운 잡초는 무성한 숲의 바닥에서 먹이를 구하는데,
매 순간 식물들의 이빨 아래 놓인 사물의 혼란한 바스락거림이 들리며,
멀리 광대한 전원의 모든 곳에서 놓아기르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는 그 힘찬 발달에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모래가 필요하고, 점토와 사암이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유향나무에, 털가시나무에 필요하고,
가시덤불에 필요하며, 유쾌한 땅은
무시무시한 숲이 먹이를 먹는 것을 지켜본다.
 


하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것인가? 우리는 꽃의 색채들이 지닌 매력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위고 자신은 대답할 것이다. 거기서 다시 한 번 검은색은 분리될 수 있다. 바닥에서 땅속의 검은 양분을 게걸스럽게 먹는 식물이 생산하는 것은 결국 또한 빛나는 생명의 꽃들이며 영구적인 위안의 색상인 것이다. 인간의 죽음의 검은색에 대해, 자연은 바람 속 한 떨기 꽃이 그 자체로 나타내는 영원한 생명을 맞세운다. 다시 「모래언덕 위의 말들(Paroles sur la dune)」이라는 시에서 인간의 죽음, 고통 등 부정적인 형태의 검은색과, 모든 식물의 감춰진 검은색이 될 수 있는 영원한 푸른색 사이 변증법의 빛나는 연출을 살펴보자.
 


어찌하여 추억은 회한에 가까운가!
어찌하여 모든 것은 우리를 울게 하며,
나는 너를 건드리며 차가움을 느끼는가, 오 죽음,
인간의 문에 걸린 검은 빗장이여!
나는 생각하며, 쓰라린 바람의 울먹임을,
뛰어넘을 수 없이 너울거리는 물결의 울먹임을 듣는다.
여름은 웃고, 해변에는
꽃 피는 모래 위로 푸른 엉겅퀴가 보인다.
 


결론으로 덧붙여 만일 상징과 깃발에서 검은색을 대체하는 것이 붉은색이라면, 술라주의 놀라운 검은색/파란색 그림과 함께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흔히 예술에서 검은색의 긍정적인 이면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파란색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분명 하늘이라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붕이, 적어도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대로, 늘 낮의 파란색과 밤의 검은색을 번갈아 나타내기 때문이다.

검은 동물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물의 검은색은 실제로 털가죽이나 등껍질과 관련된 문제다. 피부가 검은 동물은 드물고,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검은 피부는 문제가 아니다. 반면에 털은 검을 수 있고, 인간 종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털이 있는 여러 부분에 새까만 털이 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러 동물은 인간 종이 그런 것처럼 머리를 덮는 일종의 작은 모자나 성기 주변을 둘러싼 그늘, 팔 아래의 수풀 또는 가슴이나 넓적다리 위에 거무스름한 몇 가닥 띠가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완전히 검은 털로 덮이는 표범이나 말이 그렇고, 고양이는 그보다는 덜하고, 개는 그 중간쯤의 양상을 보인다. 혹은 검은 깃털도 있는데, 오랫동안 까마귀에게는 그 고유한 색상과 관련해 상반되는 평판이 뒤따랐다. 인간들은 까마귀를 불길하고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겼지만, 점쟁이의 조력자로서 미래를 보여 주는 믿을 만한 징표로도 보았다. 까마귀가 왼쪽으로 날면, 경계해야 한다! 오른쪽으로 날면, 안심해도 좋다! 까마귀는 상반되는 운명을 향한 검은색의 날아오름인 것이다. 한편 노르망디 암소들의 새까만 검은색과 순수한 하얀색은 벌써 우유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펭귄! 검고 흰 이 동물은 마치 미친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며 얼음 위를 행진한다.
 
또한 선명한 검은색의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다양한 딱정벌레목 곤충도 있다. 끈기 있는 쇠똥구리처럼 눌린 딱정벌레는 진창 속에서도 검은색의 광택을 발한다. 엄청난 바구미들(두려울 정도로 다양한 이 곤충은 전 세계에 2만 개가 넘는 종이 분포해 있다.)은 마치 보잘것없는 등껍질 아래 농작물 해충의 엄청난 유해성을 숨기려는 듯 약간 흐릿한 검은 줄무늬를 두르고 있다.
 
바다에는 바다표범의 어두운 회색은 차치하더라도 돌고래 · 상어 · 고래의 검은색이 있다. 고단하고 차가운 물속에서 붙잡히지 않고 몸을 숨기는 데 검은색이 도움이 되는 듯하다. 검은색은 살아 있는 바닷속 동물에게 관심을 끌지 않는 매끄러운 보호색으로 작용한다. 물 아래서 유영할 때는 반짝이지 않고 온전한 유연성을 제공하며 검은 꼬리의 움직임은 조용하다. 헤엄치는 검은색은 마치 불안한 그림자같이 주위를 맴돈다. 이는 잠수부의 고무 잠수복이 검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소 굼뜨기는 하지만, 상어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 거의 모든 곳에서 검은색은 색채와 대비를 이룬다. 매우 생동감 있는 색채들은 살아 있는 피부가 아니라 털가죽이나 깃털, 등껍질, 활발히 움직이는 거죽, 성과 관련한 장식이다. 삼색 고양이의 다갈색과 하얀색은 변덕스럽게도 검은색과 인접해 있다. 검은색과 하얀색의 의사–변증법은 망아지에서 토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멋부림이다. 그리고 이런 멋부림이 절정에 달하는 얼룩말은 개체마다 상이한 도식에 따라 그 검은 빗살을 배치한다. 말하자면 죽었든 살았든 얼룩말의 수만큼 뚜렷하게 구별 가능한 멋진 추상화가 그려져 있는 셈이다. 새나 물고기에서 그 조화는 눈부실 지경이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에서 비상의 소음이나 파도 위로 솟구치는 도약의 빛을 통해 검은색이 강조되는 것이다. 곤충들은 검은 벨벳과 금박의 기품 있는 조합을 완성하며, 나비의 날개 위에서 빛의 검은 방울들을 떨리게 한다! 본질적으로 동물의 검은색은 평화로운 검은색이며, 편재하는 동시에 너그러운 검은색이다. 일반적인 생명 즉 자연은 숯이나 풍뎅이나 개나 고래를 막론하고, 혹은 낮이 빠져들어 가는 깊은 밤을 막론하고 검은색과 다툴 일이 없다. 분명 포식자와 그 희생자의 범죄의 밤이지만, 또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살아가기를 지속하는 사랑의 밤인 깊은 밤을 막론하고.
 
까마귀나 고양이의 검은색을 주술로 바꾸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오로지 인간뿐이다. 검은색에 대한 소송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다.



─ 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검은색』 중에서



검은색을 수식하는 말들이 이렇게 넘쳐나듯, 실제 인쇄로 구현되는 검은색도 아주 다양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살아가기를 지속하는 사랑의 밤”을 어떤 동물의, 어떤 질감의 검은색으로 덧칠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어요. 표지 시안에는 개와 고래가 등장했는데요. 마침 고래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는 담당 편집자의 말에 다큐멘터리 소닉 씨(Sonic Sea)블랙피쉬(Blackfish)의 고래들을 떠올렸습니다. 결과적으로 표지의 넓은 면적은 깊은 바다가 되었네요. 포식자인 동시에 희생자이며, 너그럽고 평화로운 고래의 슬픈 울음이 많은 독자분에게 가닿았기를 바라요. 

디자인 후기를 읽으니 이 책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요. 전부 흡수할 듯 뻑뻑해 보이는 검은 배경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홀로그램 고래 꼬리. 그 질감들과 깊이감이 너무 효과적이라 당시 만들고 있던 책의 디자인 참고 도서로 날름 적었거든요.
식물의 검은색은 분노’, ‘살해’, ‘전투’, ‘포식과 연결되고, 동물의 검은색은 평화롭고 너그러운 검은색이라는 서술이 강력한 심상을 남깁니다. 검은색이 지닌 다양한 섬광을 언어로 느껴보고, 검은색의 새로운 상징을 얻게 됐어요. 검은색에 얽힌 여러 이미지와 글이 하나둘 떠올라요. 특히 검은색과 푸른색의 관계에 관한 구절(“모든 식물의 감춰진 검은색이 될 수 있는 영원한 푸른색”)를 되새기며, 사적 기록·비평·시가 뒤섞인 ‘블루에 관한 독특한 책 『블루엣』을 같이 펼쳐보고 싶어요.

어둠, 밤, 석탄, 잉크, 검은 개, 음흉함, 암흑의 군주, 검은 대륙, 적과 흑, 블랙 유머, 암흑 물질, 고래, 검은 표범, 흑인……. 프랑스어로 검은색을 의미하는 단어 ‘noir’ 앞에서 알랭 바디우가 떠올리는 것들이다. 작가는 곧 사상가였고 철학자가 문인이었던 프랑스의 문예 전통을 유감없이 계승하는 바디우는 이 책 『검은색: 무색의 섬광들』에서 검정에 관한 21편의 아름다운 산문을 제출한다. 외부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상황의 아이러니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떠오르는 서정성. 진리의 철학자 바디우가 처음으로 출간한 에세이는 색을 둘러싼 기억을 정치와 예술, 과학과 철학의 영역으로 불러온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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