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교육이라는 잔혹한 꿈

 

 

우리가 교육에 집착하는 이유

한편을 같이 읽어요! 오늘은 《한편》 3호 ‘환상’에 실린 글 중 교육학자 박지원의 「잔혹한 낙관에서 깨어나기」를 소개해 드려요.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 있지요. 수시와 정시 비율을 둘러싼 논쟁이나 입시 비리, 채용 비리에 대한 분노만 봐도 알 수 있듯이요. 박지원은 교육이 이러한 강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바로 교육의 꿈이 ‘잔혹한 낙관’을 불러오기 때문이라고요.

교육은 좋은 미래를 약속한다. 나는 이 문장이 교육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정의가 아닌가 한다. 교육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인정을 보장하기도 하고, 국가와 시민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거나, 소박한 인간적 행복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처럼 교육을 둘러싼 욕망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교육을 통해 모종의 좋은 삶을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교육은 저마다 원하는 삶을 반드시 가져다주어서가 아니라, ‘좋은 미래’라는 두루뭉술한 약속을 제공하기 때문에 신성한 제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추상적인 약속을 흔히 ‘꿈’이라 부른다. 학령기에 접어든 개인은 꿈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질문받으며 ‘미래의 좋은 나’에 대한 상상적인 애착을 키워 간다. 거꾸로 말하면 미래라는 환상을 더는 재생산할 수 없을 때 교육은 존립을 위협받을 것이다. “네 꿈은 무엇이니?”라는 질문은 사실상 교육의 자기 확인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교육의 약속이 도달한 디스토피아를 체험하곤 한다. 최근 인천공항 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논란은 대표적인 사례다. 2020년 6월 인천공항이 비정규직 노동자 19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자 거센 반발이 일었다. 언론을 통해 확산된 반발의 요지는 취업 시장의 공정성을 해치고 취업 준비생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급기야 공기업의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3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이는 결코 낯설지 않은 사태다. 이화여대 입학 부정, 숙명여고 성적 조작, 정치인 자녀에 대한 입시 특혜 의혹까지 지난 몇 년간 대중을 분노케 했던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교육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일의 경중이나 개별 잘잘못을 떠나 여기에 개입된 정서들에 주목해 보자.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한 박탈감과 분노는 교육이 ‘전쟁’에 비유되는 사회가 만들어 낸 지극히 교육적인 감정이다. 이는 교육이 약속한 세계, 즉 공정한 경쟁을 통해 좋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는 세계를 부정당한 것에 대한 배신감이다. 뜨거운 감정의 온도는 한국 사회가 교육의 약속을 열렬히 믿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규직이 된 또래 청년, 그걸 허락한 사회에게 빼앗긴 무언가는 다름 아닌 교육이 약속한 꿈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교육의 꿈과 함께 부서진 마음의 일부다.

 

 

 
정동 연구자 로렌 벌랜트는 불확실한 꿈에 매달리는 현대인의 마음을 ‘잔혹한 낙관주의’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잔혹한 낙관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이 있는” 대상을 향해 작동한다. 로또 당첨의 꿈은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천문학적인 당첨 확률은 로또를 더 중독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초월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불가능한 환상에 값을 지불함으로써 일상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온전한 기회의 평등’을 일시적으로 경험한다. 반면 후자는 철저히 실현 가능성에 기대는 환상으로, 교육의 꿈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낙관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육이 약속하는 미래는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환상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다. 그러나 실현 가능하다는 느낌 때문에 교육은 오히려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곤 한다. 로또는 지나치게 환상적이므로 실패하더라도 특별한 외상을 남기지 않지만, 교육의 꿈은 언제나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학습자를 끊임없이 미래의 꿈에 매달리고 현재의 삶을 유예하도록 만든다.
공교육은 꿈이라는 환상을 가장 경제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장치다. 교육 제도는 추상적인 꿈을 교과, 역량, 점수, 등급 등으로 물화하고, 학교 규범은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의 쾌락을 기꺼이 통제할 줄 아는 근면한 인간상에 가치를 부여한다. 학교가 생산하는 꿈–환상의 본질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낭만적 기대보다는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도덕적이고 아름답다.’라는 명령에 가깝다. 나아가 꿈–환상은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무엇이든 꿈꾸어야만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생존의 구호가 되기도 한다. 한국 특유의 과도한 교육열 또한 꿈–환상에 기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아동 학대에 가까운 학원 돌림은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시장 논리, ‘인적 자원의 확보’라는 국가적 목표, ‘사랑하는 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가부장적인 가족 윤리에 의해 복합적으로 정당화된다. 그 틈에서 빚어지는 교육의 꿈은 개별 주체들로 하여금 지난한 교육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만든다. 꿈의 명령이 때로 너무도 버겁거나 불안할지라도 말이다.
 

 

 
교육에 몰두할수록 더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은 공정성과 자유 의지라는 커다란 두 축에 의해서 지탱된다. 공정성과 이를 보장하는 능력주의는 교육의 꿈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룰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로, 공정한 사회를 향한 희망은 흙수저와 금수저라는 날선 현실 감각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냉소적인 태도는 얼핏 한국 사회가 공정의 불가능성을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입시나 취업처럼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유독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두드러진다. 제도 교육을 주도하는 정부와 정치 담론은 여전히 ‘계층이동 사다리 회복’이라는 협소한 공정의 구호를 놓지 못하며, 수시냐 정시냐, 실무 경험이냐 시험 점수냐를 둘러싼 돌고 도는 논쟁들은 더 큰 공정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 속을 맴돈다.
한편 교육의 꿈은 내면에 잠재된 고유한 가능성을 자유 의지를 통해 조탁해 가는 과정이다. 자아실현, 자기 계발과 자기 주도 학습, 개성과 창의성 등을 강조하는 ‘학습자 중심주의 교육’은 소위 주입식 교육이라 불리는 낡고 보수적인 교육관을 극복하는 해방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교육의 궁극적인 형태가 자기 교육인데, 이 또한 경제적 꿈과 결합할 때 자기 착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자기 교육의 목록은 계속해서 늘어나 이력서용 ‘스펙’ 외에도 도발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 교양과 개성적인 취미, 감각과 스타일, 모나지 않은 성격, 고난을 탄력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태도까지 경제적으로 유용한 모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가끔씩 솟아나 마음을 간지럽히는 비경제적인 꿈들도 어느새 자본의 꿈으로 물들어 버리곤 한다. 꿈이 시장에서 멀어질수록 개인에게 요구되는 자기 교육은 더욱 미시적인 형태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기업에 취직하는 것보다 독립 출판 작가로 살아 남는 과정이 더 자기 착취적일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꿈꿀 수 있는 미래는 점차 왜소해지고 있다. 이제 보통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자아 실현도 부자 되기도 아닌 ‘근근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삶에 수반되는 실패와 고난이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는 한, 교육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육의 꿈이 허상이고 그 결과가 겨우 덜 절망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교육은 조작 불가능한 현실을 잠시라도 손에 닿을 듯한 감각으로 변환해 주기 때문이다. 공정도 자유도 믿지 않지만 그 가능성을 놓지도 못하는 것. 이러한 역설이 오늘날 교육의 꿈을 구성하고 있다. 학생들은 입시 제도의 불공정성을 알면서도 한 등급이라도 더 올리려 공부에 매달리고, 취업 준비생들은 채용 비리 뉴스가 연일 보도되어도 조금이라도 더 높은 토익 점수를 얻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시험 점수나 자격증만이 그나마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미한’ 통제감은 잔혹할지언정 개인으로 하여금 절망을 버텨 내게 한다. 이 위태로운 꿈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이 될까. 모든 꿈이 그러하듯 교육의 꿈에는 결말이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약속하는 ‘좋은 삶’ 역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결코 괜찮지가 않다. 교육의 주체들이 한계치를 넘어 내면의 자원을 쥐어짜는 순간 부서진 마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우울과 불안, 소진, 체념, 냉소, 자기합리화, 무기력 등으로 불리는 환상의 부산물들이다. 교육의 꿈이 낳는 가장 잔혹한 결과 중 하나는 아마도 번아웃일 것이다. 번아웃은 낙관을 불가능한 지점까지 몰아붙여 종국에는 낙관을 수행하는 몸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린 상태다. 희망과 번아웃 사이에서 경험하는 체념과 우울, 소진 등 부정적인 정동은 실존적인 운명이나 성장을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무형의 값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잔혹한 교육의 명령에 대한 몸의 투항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낙관으로 인해 우울하고 소진된 이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하는가? 교육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이 반교육으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잔혹한 환상에 대한 성찰이 냉소와 허무와 절망이 아닌 또 다른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교육의 약속이 생생한 현재를 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꿈을 모조리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희망이 혼재되어 있는 지금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당장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잔혹한 환상을 대체할 생생한 기쁨 또한 감각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우연히도 낙관적 환상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재택 근무 환경에서 오가는 ‘건강히 지내시라’라는 관성적인 인사 말은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당신과 내가 얼마나 높은 확률로 살아서 재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담겨 있다. 재난이 우리에게 일깨운 것은 미래의 꿈이 아닌 현재의 삶이고, 죽음이라는 보편적이고도 필연적인 삶의 조건이다. 일상이 된 죽음의 가능성은 성장의 꿈 대신 중지의 순간들을 숙고하도록 한다. 잔혹한 낙관주의란 결국 상실의 순간을 유예하는 것, 달리 말해 슬픔의 폐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의실은 닫혔고, 영어 시험은 연기되었으며, 해외 연수도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학회가 취소되고 유학 계획이 무산되자 학생들은 뜻하지 않게 멈춰 서서 뉴스를 보고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일상이 중지된 순간들과 그 안에 깃든 죽음의 의미를 오롯이 마주하고 충분히 슬퍼하는 것은 잔혹한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첫 번째 투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20~30대의 주식 투자 유행을 다룬 기사에서 “이제는 자기계발이 아니라 ‘자본 계발’을 할 때”라는 말을 봤어요. 공감이 되면서도, ‘믿을 건 주식/부동산뿐’이라는 현실 감각이 세대를 아울러 보편적인 게 되었다는 사실이 막막하기도 했어요. “미래라는 환상을 더는 재생산할 수 없을 때 교육은 존립을 위협받을 것”이라는 문장이 실현되어 버린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고요. 좋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꿈꾸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안에서 벗어나 교육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역할은 무엇일까요? 

죽음의 가능성을 일상적으로 고려하는 게 오히려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알베르 카뮈의 말이네요. 멀리 가는 여행 계획 앞에서 영 내키지 않아 고민하는 그르니에에게, 제자이자 친우였던 카뮈는 최악의 조건 하나만 두고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고 충고합니다.
 
“오랜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떤 최악의 사태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죽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그 말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 그는 내가 떠나지 않은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주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 외에는 하지 말아야죠.”(『카뮈를 추억하며』)
박지원은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지역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로 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육의 정동을 비판하고, 취약성과 타자성에 기반을 둔 교육 철학을 모색하고자 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학을 중심으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논문 「생태주의와 생태 리터러시의 교육적 함의」, 「과도한 교육열과 신자유주의적 불안의 관계」 등을 썼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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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11 5: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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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와
      2020.11.13 2:49 오후

      한편 레터 잘 읽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힘이 나는 댓글이에요!
      교육에 대해서 한편 편집부도 늘 고민하고 있어요. 박지원 선생님 연구도, 한편도 지켜봐 주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