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나혜석의 임신, 출산, 육아 말하기

 

 

나혜석의 모(母) 된 감상기

$%name%$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환상과 현실 사이’를 주제로 편지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편지는 약 100년 전인 1923년 1월, 조선의 작가이자 화가인 나혜석이 첫 아이를 낳은 후 임신과 출산, 양육의 경험을 쓴 글입니다. “이게 현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에요.

이러한 심야 아까처럼 만사를 잊고 곤한 춘몽에 잠겼을 때 돌연히 옆으로 잠잠한 밤을 깨뜨리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벼락같이 난다. 이때에 나의 영혼은 꽃밭에서 동무들과 끊임없이 웃어 가며평화의 노래를 부르다가 참혹히 쫓겨났다. 나는 벌써 만 1개년간을 두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에 이러한 곤경을 당하여 오므로 이렇게으아.” 하는 첫소리가 들리자아이고, .” 하는 말이 부지불각중에 나오며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정직히 자백하면 내가 전에 생각하던 바와 지금 당하는 사실 중에 모순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어느 틈에 내가 처()가 되고 모()가 되었나? 생각하면 확실히 꿈속 일이다. 내가 때때로 말하는공상도 분수가 있지!” 하는 간단한 경탄어가 만 2개년간 사회에 대한, 가정에 대한 다소의 쓴맛 단맛을 맛본 나머지의 말이다. 일언일동이 모두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할 소위 가정이라는 것이 있는 줄 뉘가 알았겠으며, 주야 불문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깨깨 우는 소위 자식이라는 것이 생기어 내 몸이 쇠약해지고, 내 정신이 혼미하여져서내 평생 소원은 잠이나 실컷 자 보았으면.” 하게 될 줄이야 뉘라서 상상이나 하였으랴!
 
그러나 불평을 말하고 싶은 것보다 인생에 대하여 의문이 자라 가며,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으로 안다. 그리하여 내 앞에는 장차 더한 고통, 더한 희망, 더한 낙담이 있기를 바라며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수양과 노력을 일삼아 가려는 동시에 내 대명사인나열〔羅悅, 딸 이름〕의 모()’모 될 때모 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한 심리 중에서 ‘있었던 것을찾아 여러 신식 모들께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그랬었지요?”라고 묻고 싶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도무지 그럴 리 없다.” 하고 고집을 세울 용기는 없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이다, 태기다, 임신이다, 라고 꼭 집어내기는 싫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탕 하는 것같이 들려왔다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모든 사람의 말은 나를 저주하는 것 같고 바람에 날려 들리는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다만 여러 부인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 왔을 뿐이었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낳으면 볼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코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요, 들을 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 만무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네 생각은 결국 공상이다. 오냐 당해 보아라. 너도 별 수 없지.” 하며 나의 의견을 부인하였다. 과연 연전까지 나와 같이 앉아서 부인네들을 비난하며, “나는 그렇게 아니 살 터이야.” 하던 고등교육 받은 신여자들을 보아도 별다른 것 보이지 않을 뿐이라, 구식 부인들과 같은 살림으로 1, 2년 예사로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전에 말하던 구식 부인들은 신용할 수 없더라도 이 신부인의 가정만은 신용하고 싶었다. 그것은 결코 개선할 만한 능력과 지식과 용기가 없지 않다. 그러면 누구든지 시집가고 아이 낳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되지 않고는 아니 되나?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이었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나로부터 ‘모’의 세계까지는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만한 멀고 먼 세계이었다. 실로 나는 내 눈앞의 무궁무진한 사물에 대하여 배울 것이 하도 많고 알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그 멀고 먼 딴 세계의 일을 지금부터 끄집어내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염치없을 뿐 아니라 불필요로 알았다. 
 

나는 분만기가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람의 ‘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 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을 교양하여 사람답고 여성답게, 그리고 개성적으로 살 만한 내용을 준비하려면 썩 침착한 사색과 공부와 실행을 위한 허다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그달 29일 오전 2시 25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갖은 병 앓아 보던 아픔에 비할 수 없는 고통을 근 10여 시간 겪어 거진 기진하였을 때 이 세상이 무슨 그다지 볼 만한 곳인지 구태여 기어이 나와서 “으앙으앙” 울고 있었다. 다만 서러울 뿐이고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 후 병원 침상에서 이렇게 쓴 것이 있다. 

 
“차라리/ 펄펄 뛰게 아프거나/ 쾅쾅 부딪게 아프거나/ 끔벅끔벅 기절하듯 아프거나/ 했으면/ 무어라 그다지/ 10분간에 한 번/ 5분간에 한 번/ 금세 목숨이 끊일 듯이나/ 그렇게 이상히 아프다가/ 흐리던 날 햇빛 나듯/ 반짝 정신 상쾌하며/ 언제나 아팠는 듯/ 무어라 그렇게/ 갖은 양념 가하는지/ 맛있게도 아파야라.”
 
산파가 갓난아이를 내 옆에다가 살며시 뉘이며, “인젠 젖을 주어도 좋소.” 한다. 깜짝 놀라, “응? 무엇?” 하며 물으니까 벌써 눈치를 챘던지 자기 손으로 내 젖을 꺼내서 주물러 풀고 나서는 젖 먹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쩐지 냉수를 등에다 쭉 끼치는 듯하였다. 나를 낳고 기른 부모도, 또 골육을 같이한 형제도, 죽자사자하던 친구도 아직 내 젖을 못 보았고 물론 누구의 눈에든지 띌까 보아 퍽도 비밀히 감추어 두었다. 그 싸고 싸둔 가슴을 대담히 헤치며 내 두 젖을 공중 앞에 전개시키라는 명령자는 이제야 겨우 세상 구경을 한 핏덩어리였다. 
 
이게 웬일인가? 살은 분명히 내 몸에 붙은 살인데 절대의 소유자는 저 쪼끄만 핏덩이로구나! “세상 일이 이다지 허황된가…….” 싶었다. “에라 가져가거라.” 하는 퉁명스러운 생각으로 지금까지 맡아 두었던 두 젖을 쪼그만 소유자에게 바쳤다. 쪼그만 소유자는 젖꼭지를 덥석 물더니 쉴 새 없이 마음껏 힘껏 빨고 있다. 내 큰 몸뚱이는 그 쪼그마한 입을 향하여 쏠리고 마치 허다한 임의의 점과 점을 연결하면 초점에 달하듯 내 전신 각 부분의 혈맥을 그 쪼그마한 입술의 초점으로 모아드는 듯싶었다. 이와 같이 벌써 모(母) 된 선고를 받았다.
 

 

아기를 겨우 먹여 놓고 재워 놓고 누우면 약 2시간 동안은 도무지 잠이 들지 않고 어찌어찌해서 잠이 들면 또다시 바시시 일어나서 못살게 군다. 이것이 수개월간 지속되니, 심신의 피곤은 인제 극도에 달하여 정신엔 광증이 발하고 몸에는 종기가 끊일 새가 없었다. 전에 잠잘 시간이 너무 족할 때는 그다지 잠에 뜻을 몰랐더니 ‘잠’처럼 의미 깊은 것이 없는 줄 안다. 모든 성공, 모든 이상, 모든 공부, 모든 노력, 모든 경제, 모든 낙관의 원천은 오직 이 ‘잠’이다. 진실로 잠은 보물이요 귀물이다. 그러한 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정의를 발명하여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했다.세인들은 언제나 모친의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 있다 하면 반드시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적어도 5, 6개월의 장시간을 두고 먹여 기를 동안 영아의 심신에는 기묘한 변천이 생기어 그 천사의 평화한 웃음으로 모심(母心)을 자아낼 때, 이는 나의 혈육으로 된 것이요, 내 정신에서 생한 것이라 의식할 순간에, 비로소 짜릿짜릿한 모(母) 된 처음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 경험상으로 보아 모심에 이런 싹이 나서 점점 넓고 커 갈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솟는 정’이라는 것은 순결성, 즉 자연성이 아니요, 단련성(鍛煉性)이라 할 수 있다.

자식이란 게 왜 필요한지 알고 싶은데, 적어도 내겐 이런 의미가 있다. 나는 늙어 무능해지거든 깊은 삼림 속 포근포 근한 녹계색(綠桂色) 잔디 위에서 자결하려는데. 이 빽빽 우는 울음소리만 좀 안 들었으면 고적한 맛을 더 좀 볼 듯싶으며, 이 방해물이 없으면 침착한 작품도 낼 수 있을 듯싶고, 자식으로 인한 피곤 불건강이 아니면 아직도 많은 정력이 있을 터인데, 오직 이것으로 인하여. 이렇게 절대의 필요의 반비례로 절대의 불필요가 앞서 나온다. 통성이 아니라 독단으로. 그럴 동안 나는 자식의 필요로 조그마한 안심을 얻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다. 즉 지식으로나 수양으로 억제치 못할 불건강의 몸이 되고 본즉 “사람이 아니 하려니까…….” 운운하던 것도 역시 공상이다. 망상이었다.

1922년 4월 29일 1년 생일에 김나열의 모 씀.

─ 나혜석, 장영은 현대어로 옮기고 엮음,

「모 된 감상기」,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235~263쪽에서

논문을 비판할 때는 질문도 있을 것이요, 반대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의무나 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이 당연할 뿐 아니라 사회적 사상 방면을 우려할 여지가 있겠고 또 반성으로 요구하는 시간을 허할 수 있으나, 감상문만은 본래 논박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고 더구나 사상화하려는 것이 무슨 가치가가 있으리오. 씨(당신)가 절대의 책임을 내게 지우고 게다가 사상적이니 신여자니 하는 것으로 쓸어 맡기려 하는 것은 도무지 까닭 없는 비방이다. 부질없는 말이나, 씨는 너무 사상 방면만 편애하지 말고 인정미와 인간애로 타인에게 대할 수양이 필요할 듯싶어 충고한다. 
 
배우려면 알지 못하는 것부터 말해야 하겠고, 남의 말을 들으려면 내 말을 먼저 하여야 하겠다는 동기로 용기를 내어 「모 된 감상기」를 발표하고 기대했다. 나와 같은 정도와 경우와 경험자인 모(母) 중 1인이 내 감상기를 읽은 후의 소감이 어떠하다는 것을 써 주었으면 얻는 것과 배우는 것이 많으렸다 하였다. 그리고 만일 아무 이해 없는 딴 세계 사람으로부터 이러니 저러니 해 오면 어찌할까 염려하였다. 내게는 꼭 이 감정만은 철학 박사나 생리학 박사의 이론으로 알 바가 아니오, 아주 평범한 여러 부녀들이 오히려 그 경험에 공명될 자가 있으리라는 신념이 있는 까닭이었다. 과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양반에게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되었다. 씨의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이상 몇 점으로 보더라도 내 감상기를 빙자한 씨의 반박문은 어디로 뜯어보든지 내 감상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의외에 씨가 일반 여성에 대하여, 더구나 조선 여자, 그중에도 자칭 신여자에게 대하여 개인적으로 무슨 악감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조선 신여자의 선구”라든지, “신여자로 자처하는…….”이라든지, “신인의 면목”, “해방을 요구하는 신여자…….” 등과 같은 일종의 저주적이요, 비방적이요, 조소적인 문구를 반드시 앞세워 놓고야만 무슨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알겠으며, 이다지까지 여성 자체를 불신용하고 조선 신여자의 인격 전체를 덮어놓고 멸시하여야만 자기 반박문이 빛이 날 것이 무엇인지?
 

 

 

최후로 씨께 요망하는 바는 나도 신여자로 자처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신인이라고 해 주는 것을 별로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함이외다.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혹 다른 때 인연을 맺게 되더라도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씨여, 사상적 방황이 그다지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 중에 공명할 자가 있는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

 
─ 나혜석, 장영은 현대어로 옮기고 엮음, 
「백결생에게 답함」,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264~271쪽에서
 

 

지금보다도 더 모성애를 당연시하던 때, 임신 동안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번민, 출산의 고통, 양육의 고됨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드물었지요. 나혜석은 다짐과 실천,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절절매는 젊은 여성을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곧바로 어떤 남성 문사가 어미된 자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쓰냐면서 비판하고 나섰는데요, 나혜석은 당신 보라고 쓴 글이 아니라며 받아치죠.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마음을 느꼈던 어떤 엄마가 꼭 있을 줄 믿는다면서요. 19세기 후반 활동을 시작했던 미국의 여성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의 경험이 녹아 있는 소설과 글 역시 이러한 믿음에 기반했지요. 현실과 환상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이 믿음의 힘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음, 《한편》 3호 ‘환상’과 함께 숱한 환상문학을 읽어 왔지만 이 글이야말로 정녕 공포스럽네요. 아무한테도 섣불리 보이지 않으려고 싸고 싸둔 가슴을 공중에 전개해 내라는 아기의 모습, 그 어떤 공포소설에 나오는 악마보다 무시무시합니다. 마음을 휘어잡는 환상은 역시 현실과 가까울수록 강렬한가 봐요. 백 년 전의 선각자인 나혜석 선생님이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 화석의 그림자 아니냐?”라는 데에서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주체의 성장 과정에 관한 스피노자 또는 라캉의 이야기도 참고할 만해요. 

한국 근대 페미니즘 작가 나혜석의 페미니즘 걸작선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열일곱 편의 소설, 논설, 수필, 대담을 가려 뽑고 현대어로 순화한 이 책은 나혜석의 삶을 나혜석 자신의 글로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보다 나은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여성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장영은 교수가 당시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해설을 덧붙여 이해를 도왔다. 나혜석의 논설은(논설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인터뷰 역시) 지금의 시각에서 보아도 전혀 낡지 않았다. 약 100여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나혜석에게 글쓰기는 ‘은밀하고 사적인 취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여성들과 소통하며,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우려 했다.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 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지금은 계급 전쟁 시대지만 미구에 남녀 전쟁이 날 것이야. 그리고 다시 여존남비시대가 오면 그 사회제도는 여성 중심이 될 것이야. 무엇이든지 고정해 있지 않고 순환하니까.” ― 서문 중에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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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ub
    2020.10.22 1: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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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찐빵
      2020.10.23 12:22 오후

      저 역시 다시 읽으며 ‘선각자다!’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에 자신이 쓴 글의 의미를 두고 있는 데 감동했어요.

  2. 구독자
    2020.10.21 9:31 오전

    이 페이지를 프린트 할 수 있게 나오면 정말 좋겠네요~^^

    1. 막스
      2020.10.21 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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