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구름 잡는 이야기

  님, 한편을 같이 읽어요! ‘인플루언서와 미디어’에 관해, 오늘은 프랑스 철학에서 한편을 가져왔습니다. 민음사의 현대사상의 모험 시리즈 가운데에서도 낮은 완독률을 자랑하는 『헤르메스』인데요. 파리에 새로운 도서관 짓는 일을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컴퓨터 망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렇게 책들을 쌓아놓아 어쩌자는 겁니까?”라고 말한 철학자 미셸 세르의 책입니다. 과학과 철학을 매개하려 시도한 인식론의 거장인 그는 구름을 사유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네요. 자유롭고도 긴 호흡의 서문은 역시 쉽게 읽히지 않지만, 구름을 바라보듯이 한번 통독하면서 인상적인 대목을 표시해 보시길 권합니다. 
마침내, 시초(始初)를.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오늘날은 혼돈을 잡음, 본질음이라고 말한다. 잡음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말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혼돈을 카오스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의 질서 정연한 세계 속에서 살았고, 우리는 신호의 물결 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모든 질서의 극한에는 무질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질서와 무질서가 생각만큼 쉽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또는 수많은 다른 항해자들처럼, 팡타그뤼엘도 ‘토위-보위’ 섬을 지나서야 폭풍우를 만나 야단법석과 아우성에 빠졌다. 날마다 난파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분별한 목소리들 사이로 배가 지나가는 날도 있다.
시초에는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에 대한 정보는 누구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구름이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액체 방울, 원자나 그램분자, 반응이 알려지지 않은 아주 하찮은 구성 요소의 집합, 경계가 확정되지 않은, 이를테면 가장자리가 유동하거나 용해된 구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변덕스럽게 이동하는 벌떼 또는 이 벌떼의 늘어진 그림자 같기도 하고, 구름이 비치는 호수 또는 구름떼 같기도 하다. 이 대기 현상은 20세기가 오기 직전에 체계들이 사라지면서 형성된 어떤 지식의 모델이다. 그때 수많은 입자들의 문제가 불쑥 생겨났고, 몇몇 두뇌들이 이 문제에 몰두했다. 그들은 이 문제로 인해 시간을 낭비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초에 구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지금 이 위의 구름,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이다. 그것은 조금 전이나 예전에 지나간 구름, 또는 미래의 어느 날 내 조카딸들의 목덜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낮은 구름 더미이다. 언제나 저기, 별이 총총한 바람층에 흩어진 구름으로 인해 나는 시간을 허비해 왔다. 대기 현상으로 인해.

대기 현상은 여러 이론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질서가 있다고 추정되거나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되는 지구와, 준안정의 균형 상태에 있는 행성계 또는 태양계 사이에 굉장한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은 바로 대기 현상이다. 그런데도 철학 영역에서는 비록 하늘, 해와 달의 이지러짐, 그리고 타원이 깊이 고찰되기는 했지만, 때때로 이것들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는 구름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다만 지상의 질서를 바꾸려는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구름 속에서 사유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이는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고 의심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안정된 질서가 먼저였다. 코페르니쿠스 역시 안정된 질서 찾기에 몰두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천체의 회전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발견을 비롯하여 여러 범주의 혁명은 변하게 마련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질서가 한가운데에 예외처럼 실재했다. 무질서는 비록 이론에 접근할 수 없는 농부, 선원, 하찮고 굶주린 일부 서민에게는 관심거리일 수 있다지만, 그래도 역시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시초가 다가온다. 흔히 말하듯이, 세계관이 뒤집힌다. 속임수의 울타리 바깥에서, 이른바 세계의 체계 바깥에서, 커다란 무질서가 화려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세계이다. 지상의 사물 한가운데에, 물질과 삶과 메시지의 내부에 무질서가 자리 잡는다. 대기 현상은 명백한 무질서로서 법칙이 지배하는 두 질서 사이에 나타나는 보기 드문 예외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와 반대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가장 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한 낡은 체계들은 멈추지 않는 바다 위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들은 결정체, 유기체 또는 행성, 여기저기에서 구름 위로 솟아올라 바람에 단련되는 산꼭대기, 올림포스 산일 뿐이다. 질서는 무질서가 퍼져 있는 곳에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것일 따름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바뀌고 규칙이 예외로 바뀐 셈이다. 실로 구름은 사람들이 학파의 폐쇄성과 도시 공학에 젖어 아랑곳하지 않는 좋은 날씨 또는 나쁜 날씨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속과 우리의 주변에, 사물 자체의 브라운 운동에, 그리고 생물계와 역사 영역의 무작위 정류성(停留性)에 깃들어 있다. 구름은 가깝고도 멀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구름은 바로 내 몸, 내 몸의 유지, 생식, 목소리만큼 나와 인접해 있으며, 이와 동시에 내가 구름에 마젤란이란 이름을 붙이면서 구름을 보거나 측정할 때만큼이나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구름은 대기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예외 없이 구름이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어떤 것이건 유동한다. 그리고 사물, 육체, 메시지, 의미, 질서 정연한 구조 또는 심지어 체계가 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이 있다 해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있을 때에도,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이것들은 오직 떼섬의 형태를 띤다. 이것들은 무정형의 광막한 대양 위에 흩어진 스포라데스이다. 합리적인 것일지라도 빈틈이 있다. 합리적인 것은 산마루, 꼭대기, 주변적인 결과물이며, 구름층에서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어떤 초(超)구조이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세계는 유별난 대기 현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합리적인 것은 있음직하지 않다. 법칙, 규칙, 질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지칭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있음직하지 않은 것이며, 기껏해야 일어날 수 없는 것과 아주 가깝다. 합리적인 것은 기적적이거나 매우 드물거나 예외적이어서 비실재에 달라붙고, 어디까지나 영(零)이나 무(無)에 가깝다. 있음직한 것이란 합리적인 것 바깥의 나머지이며 보충적인 듯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증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동어 반복이지만 실재하는 것은 가장 있음직한 것이다. 그런데 가장 있음직한 것은 무질서이다. 무질서, 다시 말해서 구름 또는 바다, 천둥 치는 비바람, 잡다한 사람들의 무리와 군중, 카오스, 혼란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현실은 합리적이지 않거나 극단적인 한계에서만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예외와 드문 것과 기적에 관한 과학이 있을 뿐이다. 섬, 산발적인 것, 그리고 초구조에 관한 지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로 하여금 현실은 합리적이라고 믿게끔 만든 어떤 것이 항상 있어 왔는데,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노예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란 아마 권력일 것이다. 가령 태풍, 아우성, 고요를 뚫고, 섬에서 섬으로 나아간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신화에 속할 뿐이라고 믿게 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일 것이다. 혁명이란 말은 질서에, 우리 머리 위로 천천히 도는 우주의 질서에 관련되는 낱말이므로, 체계의 속성을 띠고 있는 낱말이므로, 이러한 지식의 새롭고도 오래된 전도(顚倒)를 규정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경우에도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 낡은 과학과 낡은 철학 위로 뇌우가 닥친다. 천둥 치는 비바람, 풍랑, 구름, 대기 현상, 해일, 그리고 육지로 바다가 침입한다는 의미에서의 위반이 일어난다. 하늘에 불의 에너지가 번개로 번뜩이는 가운데, 아래쪽에서는 아주 오래된 문화 구성체들이 대부빙군 같은 것을 밑받침한다. 법칙의 임의성 또는 있음직하지 않은 성격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현실은 태초의 경우처럼 대홍수이다. 가장 오래된 것이건 가장 평범한 것이건 바다가 갈라지기 직전에 혼돈 상태에서 다시 발생하기 시작하는 대홍수이다. 현실은 떼 지어 아우성친다. 현실은 합리적이지 않다. 합리적인 것은 매우 자주 침범해 오는 대홍수에서, 곧 현실에서 한동안 드문드문 솟아나 있는 섬이다. 미분화할 수 없는 것 위로 뚜렷이 드러나고 명백히 구별된 뾰쪽한 섬, 구체적이고 정확하며 엄밀한 섬이다.

 

시초에 뇌우가 있다. 팡타그뤼엘의 항해를 뒤따라가면, 곧바로 항해 착오를 확인할 수 있다. ‘토위’와 ‘보위’는 섬이 아니라 바다이다. 이 시초에는 지점이 이미 정확하지 않고 해도 작성도 역시 허망한 짓이다. 항해 안내도를 작성한 자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무질서가 소멸될 수 있기를, 의미 없는 소리가 섬처럼 국지적이고 일시적이기를, 법칙이 일상적이기를 원한 자이다. 따라서 그는 세이렌처럼 두려워해야 하고 처음부터 벗어나야 하는 좁은 지점들을 빠짐없이 드러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이 합리적이기만을 바라는 자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우성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았다. 아우성은 합리성이라는 도형장에서 입이 틀어막힌 채 괴로워하는 사람들로부터, 합리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유죄를 선고받은 무리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지도가 뒤집히고, 질서와 무질서가 뒤바뀐다. 섬은 호수이고 바다는 대륙이다.
질서는 갈라진 틈들을 제외하고는 도처에서 세력을 떨친다. 질서는 옛 과학의 공준(公準), 최초의 교의, 우리가 방금 뒤집어 본 공준, 위반에 힘입어 조금 전에 정체가 드러난 교의이다. 바다 위에 몇몇 떼섬이 있거나, 아니면 대륙 사이의 단절이 묵인되거나 해야 한다. 질서는 낡은 과학의 오래된 방황이었거나, 아득한 옛날에 낡은 질서 체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결합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방황이나 결합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파괴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과학의 이름으로 왕좌와 제단, 왕과 사제의 공모를 파기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고찰컨대, 이 공모보다는 권력과 객관적이라고 주장되는 지식 사이의 공모가 더 심각하고 더 위험하다. 과학은 종교의 자리를 차지했는데도 이웃을 바꾸지 않았다. 과학은 언제나 검과 가깝고 칼이 되는 경향이 있다. 백과전서는 칼의 보호를 받는다. 권력은 질서를 원하고, 지식은 권력에 질서를 제공한다. 즉위식이 거행될 때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시작의 순간마다, 과학은 권력, 명령과 복종, 제압과 점유의 정리(定理), 이를테면 군호(軍號)를 약정한다. 시초에 명령이 있다. 시초에 방법을 위한 전략이 있다. 아마 다음 책에서 언급될 예외를 제외하면, ‘새로운 지식’은 결코 ‘즐거운 지식’이 아니다. 즐거운 지식이란 질서가 무질서로 반전되기를 기대하게 하는 반면에,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순서 구조를 답습하며, 쉽게 순서 관계 속으로 편입된다. 권력은 바로 이 순서 구조이자 이 순서 관계, 곧 질서이다. 다시 말해서 권력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어느 누구도 결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방향, 일방통행, 또는 통행이 금지된 방향이다. 권력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다. 권력은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연속적인 침범을 통해, 한 지점에서 다른 많은 지점으로 움직인다.
물론 모든 권력이 질서인 것은 아니다. 권력은 질서의 최소한도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점점 더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발점에 기원, 원천, 상류, 중심 등 어떤 이름을 붙이든, 지금부터 출발점은 지휘소이며 빛나는 광원이다. 모든 것이 출발점에서 나오지만, 출발점 쪽으로 향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최고점 또는 최대한도, 하부 지점 또는 바탕, 중앙 또는 중심지, 어느 것이라 하건 비슷비슷하거나 동일하다. 단순한 은폐술을 통해서나 환상 또는 무대 장치를 통해, 우월한 것과 중심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실재한다고 믿게 만들 수는 있지만, 언제나 똑같은 구조, 똑같은 관계, 똑같은 지점이 있을 따름이다. 과학은 이 지점에 관한 앎이며, 권력은 이 지점에 놓여 있다. 거기에서 시작된 길들은 돌아갈 수 없는 일방통행로로서, 추이적으로 연쇄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선 한 점을 중심으로 균형 잡힌, 그리고 내가 조각상이라고 명명한 것, 동일 존재가 유래한다. 이해, 지성 또는 실체, 체계나 에피스테메를 이러한 균형과는 다른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것이 엄밀한 시각일까? 에피스테메나 과학은 하나의 중심, 어떤 정적인 집합을 완전히 에워싸는 연쇄였다. 공간을 침범하는 법칙에 따라, 법칙이야 어떤 것이건 상관없이 생겨난 연쇄였다. 직선, 파선, 계통수 또는 계통망을 낳는 연쇄였다. 기하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가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왕에게 제공하는, 또는 철학자가 장군에게 건네주는 그토록 오래된 근거의 격자틀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추상적이다. 이보다는 차라리 우화나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구름을 기억하는가? 구름은 별안간 비가 되어 쏟아진다. 그러면 개울에는 깨끗한 물결이 흘러간다. 그때, 늑대는 통행을 규제하려고 벌써 거기에 와 있다. 거기에서 라퐁텐은 그의 백열하는 천재성 덕분으로 결코 굼뜨고 느린 추론에 빠지지 않고 데카르트를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그들은 이론적 담론이 세탁부들에게 숨기는 것을 그녀들에게까지 이해시킨다. 모든 시작, 정립 또는 재출발에서 당신은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고, 끊임없이 질서와 구조와 관계를 다시 찾아낸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우리가 혼돈에 실려 가고 질서가 드물다는 것을 알고 목격한다. 이것은 나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폭풍우가 너무 격렬해서 이제 우리에게는 항해 착오라는 사치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섬-과학은 항구의 구실을 하지만, 거기에는 선체와 화물을 모조리 난파시킬 암초가 즐비하다.
 
시초에는 구름, 뇌우, 강, 개울 등 이 무질서의 적나라한 형상이 도처에서 늘어난다. 마침내 철학이 상아탑 바깥으로 나간다. 여기에 바다, 무정형의 바다가 있다. 바다와 혼합물. 과학과 소금이 뒤섞이는 카오스의 수프, 새로운 아프로디테가 솟아나는 소용돌이. 곧이어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등장할 부산하고 박식한 비너스. 여러 세계가 거의 정지하고 있는 모형으로서 솟아나는 에피쿠로스의 카오스, 선회하는 준안정의 물결. 우리는 균형 상태로부터 멀어진 것들에서 여전히 카오스를 재발견할 수 있다. 볼츠만이 바닷가에서 죽기 전에 어렴풋이 본 분자의 검은 상자, 화실(火室). 그는 마치 자신의 재를, 여러 군데가 부패한 몸, 우글거리는 벌레로 인해 해체되고 있는 몸을 태초의 아우성과 혼돈 가까이에 뿌리기를 갈망한 듯이 바닷가에서 죽는다. 바다, 유동하는 무정형의 액체. 거기에서 니체는 바이러스에 의한 몸의 산일(散逸), 그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화학에 의해 실행되는 용해의 문제를 청교도적인 강경한 태도로 파헤친다. 그러는 동안 베르그손은 대기 현상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대상들을 다룬다. 이와 동시에 무질서가 텍스트와 세계를 침범한다. 구름이 유럽을 뒤덮는다. 이런 식이다. 졸라의 작품에서는 많은 주민이 분주히 움직였다. 바르베의 작품에서 구름이 다시 나타난다. 거기에서 구름은 아브랑슈의 장이자 맴도는 군중이다. 마법에 걸린 자들이 헤매는 카오스로서의 황야이다. 과학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나 철학이 흐리게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는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초에는 무질서가 있다. 흔히들 무질서는 오래된 것이거니 한다. 무질서는 최초의 담론들로 공간의 누더기를 추스르려 했던 어두운 여명기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내 몸이라는 복합체 안에 어지럽게 합쳐져 있는 검은 상자들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거기에서는 본질음이 그치지 않고 크게 울려나온다. 거기에서 예외적으로 언어가 생겨난다.
 

시초에 배치가 있다. 원자들, 점들 또는 모든 하찮은 것들의 배치. 무질서, 혼란스러운 소리, 누더기, 장터, 군중, 산산조각으로 찢긴 황야, 해체 또는 혼합, 화실, 카오스, 열려 있거나 닫힌 검은 상자, 뇌우, 구별할 수 없는 것, 혼돈. 시초에는 여러 가지 배치가 있다. 이를테면 여러 가지 카드 분배가 있다. 여건과 현실은 무작위의 카드 분배일 따름이다. 이것이 연속적인지 불연속적인지는 나도 모른다. 카드 분배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주거나 배분한 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카드 분배는 엄연히 일어나며 구름처럼 지나가면서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벌써 배치라는 말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통상적 의미 또는 과학적 의미보다 훨씬 덜 정리된 의미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전(前)배합적, 심지어는 전집합적 의미로 이해하기 바란다. 그렇다. 온갖 부족이 공간에 흩어져 있건만, 어느 누구도 그 방식을 알지 못했다. 물, 수증기, 탄화수소를 함유한 연료, 인쇄술상의 배열에는 이미 과도한 질서가 있다. 이미 계열, 분류, 초안, 분기점이 있다. 수나 요소의 상대적 배열에도 여전히 과도한 질서가 있다. 배치는 언제나 전질서이다. 모든 구조에 앞서 말을, 정의에 앞서 사물을 다루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헤르메스는 배달부가 아니다. 분배하지도 않는다. 헤르메스는 메시지를 배포하지도 나누지도 분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메시지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는 카드 분배 자체이다. 그는 지나가고 동시에 그대로 있다. 헤르메스의 메시지는 혼돈스럽다. 그것은 문자들로 이루어진 구름이다. 더 적절하게 말해서 아직 문자가 아닌 어떤 요소들로 형성된 구름이다. 신비성은 비밀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제 비밀을 익히 알고 있다. 비밀은 분산이다. 비밀이란 실로 분산 속에서 가장 잘 감추어진다. 우리는 분산에 관한 정보가 없다. 헤르메스, 잡음, 하부 분포. 현실은 무수히 넘쳐난다. 현실은 헤르메스의 지팡이처럼 소용돌이친다. 현실이 갈림길과 입체 교차로를 벗어나 소용돌이 쪽으로 접어든 것이다. 현실의 몫을 새롭게 할당해야 한다.
 
─ 미셸 세르, 이규현 옮김, 『헤르메스』(1977) 서문

미셸 세르는 수학자로 출발해 라이프니츠 연구, 인식론 연구를 통해 바슐라르를 잇는 프랑스 인식론계의 거장으로 평가된다. 생애 후반에는 문학, 예술, 법, 교육 등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문화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을 다루는 문화철학으로 나아갔으며,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을 모색함으로써 데카르트, 베르그송, 구조주의로 이어져 온 프랑스 백과전서적 학풍을 이어받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1969년 클레르몽-페랑 대학에서 과학사 교수로 취임한 후, 파리 8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파리 1대학 역사학과에서 과학사를 가르쳤으며 지난 2019년 여름 작고했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 지역을 자신의 학문 영역으로 삼는 세르의 주요 저서로는 ‘헤르메스’ 5부작을 비롯해 『청춘, 쥘 베른에 관하여』, 『오귀스트 콩트, 실증철학 강의』, 『기생자』, 『기원』, 『초탈』, 『기하학의 기원』, 『자연 계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