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옛날 얘기를 하면 엄마랑 아빠랑 말이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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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도 없이 가져간 옷을 한 주일 후에 가져다주시는 이 동네 저 동네의 세탁소 분들은 초능력을 타고 나셨나?’

‘컴퓨터 자판에서 ‘ㄴ’이 어디 있는지를 말로 하는 것보다 ‘안녕하세요’를 더 빨리 칠 수 있으니 기억은 손가락이 하는 것일까?‘​

‘독일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밭에 추락하는 비행기를 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데, 왜 아무리 검색해도 그런 사건이 없을까?’

‘같은 곡을 계속 연습하면 대체 머릿속에서는 뭐가 달라지는 걸까?’

‘왜 옛날 얘기를 하면 엄마랑 아빠랑 말이 다르지?’

 

 

이런 궁금증들이 가끔 생깁니다. 기억은 왼쪽 귀와 오른쪽 귀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만, 나의 통제를 받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기억은 팔다리보다는 위장을 닮아서,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해마를 찾아서』의 첫 장에 인용된 존 어빙의 말(“당신은 당신이 기억을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기억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대로지요. 그렇다면, 평생 구슬러 가며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 친구를 이해라도 해 보고 싶어집니다.

저자인 힐데 외스트뷔와 윌바 외스트뷔는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해부학에서 시작하여, 뇌 손상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던 고전적인 뇌 연구, 활동 중의 뇌를 관찰하는 첨단 영상 기술, 외상 후 트라우마나 기억상실증이나 공감각적 기억력이 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 등을 통해서 기억에 접근합니다. 신경심리학자와 작가인 동생과 언니는, 상담 사례집 같은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인터뷰와 실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균형 잡힌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기억이라는 친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좀 더 잘 안다면, 이 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기도 더 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새로웠던 건 범죄 수사의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였습니다. 혐의자를 ‘무너뜨려’ 자백을 받아내던 범죄 수사가, 무슨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함께 기억해 내는 노력으로의 전환되어 가던 과정이었지요. 이는 단순히 고문 금지나 무죄추정의 원칙 차원의 논의가 아닙니다. 기억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증인이나 혐의자나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수 있고,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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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ABC 살인사건』을 읽으신 분들은 이쯤에서,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살인을 자백한 알렉산더 보나파르트 커스트에 대해 포와로 경감이 했던 말을 기억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넘어간다는 것(suggestible) – 커스트 씨의 수수께끼는 이 한 단어에 있지요!” 그는 어떤 외적인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뇌전증으로 인해 기억이 끊기기도 하고 워낙 불안이 심했던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생겨서 자백을 했던 것입니다.

기억이 팔다리보다는 위장을 닮았다고 써 놓고 나니,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말 한 마디로는 움직일 수 없고, 그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서 살살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열심히 앉아서 외우면 될까요? “단어 100개를 줄줄이 외우는 연습을 하면, 단어를 줄줄이 외우는 능력이 좋아지는 거죠.”라는 크리스티네 발호브드의 말을 새겨들어야겠지요. 이 책이 절대로 기억력 천재가 되는 법을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해 경험을 하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기억이 좋아하는 건 그런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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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를 찾아서』의 번역가 안미란

연령 12세 이상 | 출간일 2019년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