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변하는 풍경―김세희 소설집 『가만한 나날』

14583_1618_635

 

김세희는 인상주의 화가처럼 쓴다. 인상주의 그림의 특징은 풍경과 빛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실내의 정물 대신 야외의 풍경을 그렸다. 창에서 드는 일정한 빛이 아닌 하루 동안 변화하는 빛을 질료 삼아 시간마다 다른 느낌의 풍경을 그렸다. 중요한 것은 거리와 빛이다. 방보다는 멀고 정원보다는 가까운 거리에서, 빛이 드는 풍경을 관찰한다. 관찰하는 대상이 아침의 첫 빛을 받는지 저녁의 어스름을 받는지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에서 김세희는 삶을 이루는 연애, 취직, 이별 등의 풍경에 아침 해가 들 때부터 저녁의 빛이 저물 때까지를 관찰하여 각기 다른 소설을 선보인다.

 

KakaoTalk_20190308_150241777_03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는 동이 터 오는 새벽의 풍경 같다. 혼인 신고를 먼저 하고 1년 뒤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나’와 ‘루미’, 이대로라면 아마도 결혼을 하게 될 연인의 시간. 얼핏 들뜨고 낭만적일 것 같은 그 시간은 의외로 춥고 비정하다. ‘나’는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를 허름한 시골집에 모셔 놓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술을 좋아하는 자신이 미래에 아버지처럼 늙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떤다. 한편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는 일몰 직전을 포착한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연하의 애인 ‘연승’에게 이끌려 애인이 우상처럼 생각하는 선배 ‘소중한’의 집에 함께 방문하게 되는 ‘진아’, 그들 사이를 비추던 밝고 따뜻한 에너지는 곧 저물 것이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선배의 집에 올라갔다 내려오며 진아는 “자신을 연승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고 믿었던, 그들의 연애를 지탱해 주던 생각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낀다. 한때 진지하게 믿던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 그 변하는 감정과 관계를 고스란히 느끼며 서 있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일” 것이다.

 

빛은 연애에만 들고 나지 않는다. 김세희가 주목한 또 하나의 풍경은 바로 회사다. 「가만한 나날」과 「드림팀」은 가장 뜨거운 한낮의 풍경 같다.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막 벗어나 사회인이 되었을 때.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내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 내 머리 위에서 햇볕이 곧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것처럼 뜨거울 때. 그러나 두 작품을 곰곰이 읽다 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시간이 보인다. 뜨거웠던 한낮을 그려낸 풍경을 그 열기가 한풀 꺾인 늦은 밤에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시차가. 「가만한 나날」의 경진은 시간이 지나 회사를 그만둔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예전 직장 동료에게 자신이 가장 열정적이었던 순간에 대해 “그땐 몰랐는데, 저도 그렇게 적성에 맞았던 것 같지는 않아요.”라고 정정하고 싶어 한다. 「드림팀」의 선화는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고 한참 지나서, 이직을 한 뒤에야 첫 직장에서 만나 미워도 미워할 줄 몰랐던, 비교대상이 없어 비교할 수 없었던 ‘첫 상사’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쓴다. 그것들은 모두 선화와 경진에게 “오래전 일이었다.”

 

김세희의 거리감은 관찰하는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와, 관찰한 장면에 대한 시간적 거리를 동시에 지녔다. 무수히 흘러갈 하루, 비슷하게 지나갈 일상을 몇 번이고 붙든다. 그때 마음 좀 이상하지 않았어? 그 사람 말하는 거 정말 재수 없지 않았어? 하고 의심이 드는 장면을 지나치지 않는다. 연애라는 사생활에서, 직장이라는 사회생활에서 마주하게 된 상대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한 사람과 얼마나 무수한 빛깔의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인상주의 화가들은 같은 곳에서 바라본 같은 풍경일지라도 빛이 언제 드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김세희는 우리의 밤과 낮, 우리의 일과 사랑, 우리의 소속과 관계를 추상화하지 않고, 신화화하지 않고, 그저 달라질 뿐이라는 것을 아는 채로 그린다. 성실하고 미더운 일상 풍경의 기록자. 그것이 김세희의 인상, 그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의 인상이다.

 

민음사 편집부 김화진

김세희
출간일 2019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