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회의 테이블에 표지 시안이 등장하고, 북 디자이너와 편집자 사이에는 긴장이 감돈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좋은 표지’와, 이야기와 어울리는 ‘좋은 표지’는 자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은, 표지란 책이 세상에 짓고 있는 표정이라는 것. 세계문학전집 『닥터지바고』의 표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표지 모델 ‘라라’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D: 디자이너, E: 편집자)

 


 

 

총을_겨누는_라라

 

“축일의 거리를 걷고 있는 그녀는 무섭도록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따라서 주위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숙고된 총탄은 누구를 겨냥하는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탕, 하고 발사되었다. 그 발사만이 그녀가 의식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 그것은 코마롭스키를, 그녀 자신과 자신의 운명을, 그리고 두플랸카 풀밭의, 기둥에 과녁을 파 놓은 참나무를 겨냥한 발사였다.”―본문에서

 

D: 회의에 들어가기 전 국내외에 이미 출간된 『닥터 지바고』의 표지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80%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동명의 영화 스틸이 차지했고, 나머지들도 거의 다 연인 이미지나 러시아의 겨울 풍경이었다. 그런데 겨울 풍경은 다소 거칠게 느껴져서, 러시아 혁명기라는 시대적 배경만을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E: 맞다. 소설로서 서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 해외 출판사의 표지를 보았는데, 단발머리의 여성이 단독으로 등장한 표지였다. 라라가 떠올랐다.

D: 이거다 싶었다.

E: 그렇다. 번역자인 김연경 선생님도 라라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굉장히 집중했다. 경제력 없이 여기저기 의존해 살아가는 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학비를 면제받는 영리한 모범생.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어머니의 정부에게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총을 겨눌 수 있는 소녀.

 

 

기대어_있는_라라

 

 

“그녀가 하는 일은 모두 너무나 훌륭하다. 그녀는 독서가 인간의 고상한 활동이 아니라 동물도 해낼 수 있는 뭔가 아주 단순한 일이라는 듯 책을 읽는다. 꼭 물을 나르거나 감자를 깎듯이 말이다.”―본문에서

 

D: 하지만 이런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는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E: 영화가 워낙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던 고전 중의 고전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이미 ‘줄리 크리스티’라는 배우의 외모에 익숙해져 있기도 하고.

D: 게다가 소설 속에는 비교적 라라의 외모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온다.

E: 회색 눈과 금발.

D: 소설 속의 설정을 1:1로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 러시아라는 무대가 중요한 소설인 만큼 되도록 따르고자 했다. 회색 눈과 금발의 여성이면서, 기존의 라라와는 다른 분위기를 줄 수 있는 장치.

E: 그게 베일이었을까? (끼워 맞추기)

 

 

줄리_크리스티

 

 

“이 새로운 것은 또한 간호사 안티포바였다. 그녀는 전쟁에 의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던져져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을 살고 아무것도, 아무도 탓하지 않은 채 불만이 있어도 거의 말하지 않고, 수수께끼처럼 과묵하되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평생 동안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려고 노력한 유리 안드레예비치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 그 정직한 노력 또한 너무도 새로운 것이었다.”―본문에서

 

E: 그렇다고 라라(안티포바)가 우리가 기대하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에 해당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전형이 되기를 거부한다. 라라 역시 어머니의 정부인 코마롭스키와의 관계, 지바고와의 불륜 관계 그리고 라라 그 자체로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이다.

D: 맞다. 그 입체적인 느낌이 베일의 형태에서 잘 드러난 것 같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베일인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베일인지 용도가 모호하다.

E: 검은 점이 다했다.

D: 그런데 솔직히 환 공포증이 있으신 독자들에게 항의가 들어올까 봐 걱정했다.

E: 다행이다.(웃음)

D: 그리고 사실 표지 이미지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꼭 라라 때문만은 아니다. 성별을 떠나, 거친 눈발 속에서도 서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강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E: 정말이지 이번 표지는 의견이 빠르게 일치된 편이다. 우리의 이런 확신이 독자분들께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런 라라, 그런 라라를 사랑한 지바고, 그리고 그런 지바고마저 사랑한 토냐의 삼각관계 속에서 러시아의 격변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D: 깨알 홍보 (ㅋㅋㅋ)

 

 

닥터 지바고_세트_RGB

 

“어떤 사람이 기대했던 모습과 다르고 미리부터 갖고 있던 관념과 어긋나는 건 좋은 일이죠. 하나의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종말이자 선고를 의미하니까.”-본문에서

 

D: 디자이너 박권웅

E: 편집자 박혜진(1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