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충동은 귀향할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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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인문학』은 명품 소비라는 특정 문화 현상을 통해 동시대를 깊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 현미경 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질 들뢰즈의 욕망 및 정체성 이론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인간의 모든 가치와 행동은 신념의 반영이며 그 신념의 기저에는 어김없이 어떤 세계관이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전학자 김동훈 선생님은 특정 브랜드와의 접속이 욕망의 결과이며, 그 욕망은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접속과 배치를 통해 특정 방향으로 향하던 ‘욕망’이 몸에 배면 취향이 된다. 이때의 욕망을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욕망’이라 불렀다. 브랜드에 대한 욕망도 그와 같다. 우리 손이 운전대와 접속하면 운전하는 손이 되고 지휘봉을 잡으면 지휘하는 손이 되지만, 다른 사람의 손과 접속하면 악수하는 손이 된다. 운전자인지 지휘자인지, 아니면 친구인지 하는 정체성은 내 손 자체에 있지 않고 접속과 배치를 통해 확립된다. 그때 무엇과 접속하고 싶은지는 전적으로 나를 자극하는 대상과 내 욕망의 문제다. 브랜드의 소비도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다.

―김동훈, 『브랜드 인문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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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나 명품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많았는데, 이제 보다 더 깊은 진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을 기획한 의도와 맥을 같이하는데, 우선은 기업들이 단기 이익에 급급하여 가치관을 잃어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사회 전반에 돈만 되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한 것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고유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브랜드가 어떤 가치관 위에서 혁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우리의 욕망이 소비에 집중돼 있다는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진단입니다. 그 소비가 그저 시장적 가치와 광고에 휩쓸려 허영으로만 그치지 않도록 ‘취향’과 ‘정체성’ 문제를 꺼냄으로써, 인문학의 임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꼭 ‘필요’라기보다는 ‘욕망’ 때문에 특정 상품을 사 왔다. 욕망은 결여된 것을 소유하려는 어떤 운동이다. 하지만 브랜드를 향한 욕망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욕망의 복잡성은 점묘화의 무수한 점들과 같아서 그것 자체로는 도무지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지만, 브랜드의 바탕에 깔린 욕망의 생성과 이동을 모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거나(범주화하거나) 다른 차원(인문학)으로 볼 때 표면에 떠오르는 자태가 있다.

―김동훈, 『브랜드 인문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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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일상이나 일터에서 꽃피우는 창의력이나 혁신은 인문서로 포장된 자기계발 서적들이 말하는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적으로’ 지향하는 정신과 ‘인간으로서’ 갖는 욕망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고딕성’이라는 이질성이 자극하는 창조의 에너지와 ‘낭만주의’ 속에 녹아든 숭고의 원리를 끄집어내고, ‘바로크’의 우아함과 ‘로코코’를 촉발한 해소되지 못한 에너지가 어떻게 승화되는지 살펴봅니다.

 

『브랜드 인문학』은 감각의 자극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눈을 뜨도록 자극하는 화려한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결코 어느 하나의 자극에 안주하거나 종속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오뒷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겠다는 감각 자극의 욕망을 실천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음으로써 귀향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창조적 자극을 받기 위해 욕망의 유혹에 몸을 맡기더라도, 오뒷세우스처럼 결코 각자의 목표를 잃지는 말아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체험하려는 주이상스의 궁극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 과잉의 욕망인 죽음충동은 귀향할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

 

 

양희정 부장

김동훈
연령 8세 이상 | 출간일 2018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