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는 특히 내가 속한 팀에는 소위 벽돌책이라 하는 두꺼운 시리즈물이 많다. 1000쪽이 넘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 중국 인물 평전 시리즈를 비롯해 무려 19권에 이르는 김우창 전집, 이제 막 두 권이 나왔고 앞으로 두세 해 동안 건너 자리의 대리님을 괴롭힐 하버드-C.H.베크 세계사(전 6권 예정)까지. 책등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불러 온다. 이들과 함께 사무실 책장을 넉넉히 소진하고 있는 시리즈가 『문명 이야기』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1만 년의 인류 역사를 담은 명저. 듀런트가 이 책에 반세기를 바쳤다는 사실을 새기면서 ‘인류 문명의 유장한 파노라마’라는 카피를 읽으면 왠지 사람이 겸손해진다.

 

이번에 듀런트의 얇지만(다행히) 내용은 아주 깊고 넓은(당연히) 책 『노년에 대하여』와 『위대한 사상들』을 만들면서 그의 삶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듀런트는 젊은 시절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했다가 급진 사회주의자로, 소련 방문 후 다시 자유주의자로 급커브를 거듭했다. 열세 살 어린 제자 에어리얼과의 사랑과 결혼으로 본인도 인정한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후에 듀런트 부부의 삶은 백년해로의 궤적에 가까웠으니 그나마 용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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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플린의 『공부해서 남 주다(Blue Collar Intellectuals)』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1920년대에 듀런트는 노동조합 회관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칸트, 니체 등 서양철학자를 한 명씩 소개하는 소책자들을 냈다. 이것이 당시 경력이 많지 않았던 출판업자 딕 사이먼과 맥스 슈스터에게 연결되었다. 세계적인 출판사 사이먼 앤드 슈스터(Simon & Schuster Inc.)의 그분들 맞다. 특히 슈스터가 듀런트의 열렬한 팬이었다. 소책자 열한 권을 하나로 묶어 『철학 이야기』를 출간하면서 사이먼과 슈스터는 사운을 걸었다. 막대한 광고비에 판매 특별수당, 환불 보장 정책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다.

 

그만큼 듀런트의 살아 있는 글쓰기, 상아탑의 언어가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을 엮어 감칠맛 나게 풀어내는 철학 ‘이야기’에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철학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철학 입문서로 널리 사랑받을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사이먼 앤드 슈스터는 그전까지 “가로세로 낱말 퀴즈 책을 주로 판매하는 회사”로 알려졌다는데 『철학 이야기』의 성공을 통해 미국 굴지의 출판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후 여기서 나온 무수한 양서를 생각해 보면 업계 종사자로서 참 감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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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런트에 관해서라면 여기 또 한 명의 팬이 있다. 순전히 듀런트에 대한 애정으로 ‘윌 듀런트 재단’을 설립해 그의 남은 작업들을 정리하고 또 출판한 존 리틀이라는 사람이다. 리틀은 유족들로부터 듀런트의 저작물과 일기, 서신, 에세이 등 자료 일체를 검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00년 가까이 살았고 평생 펜을 놓지 않은 듀런트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생전에 출간된 책도 있지만 기고문이나 강연문의 형태로 극히 짧은 시간에 소임을 다하고 묻힌 글이 어마했다. 이 자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정리하고 책으로 엮어 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다.

 

듀런트의 유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 속의 영웅들』도 리틀의 정리를 거쳤고, 『노년에 대하여』와 『위대한 사상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노년에 대하여』는 그가 아니었으면 원고를 발굴하지도 못했다. 지역 신문 인터뷰에서 짧게 언급된 내용을 근거로 미국 전역의 문서보관소들을 뒤지고 극적으로 원고를 발견해 낸 과정이 책의 서문에 실려 있다. 그렇게 듀런트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야  『노년에 대하여』가 빛을 볼 수 있었다. 재단 홈페이지에서 듀런트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보면 리틀이 듀런트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헤아릴 수 있다.

 

“누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위대한 사람만이 역사를 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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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듀런트의 추종자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팬이 따르는 것은 그 사람 혹은 그가 만들어 내는 무엇이 매력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듀런트 글의 매력은 솔직함과 문장력이다. 자꾸 밑줄을 긋게 되고 스크랩을 하게 된다. 다소 예스러운 시각이 드러날 때는 하릴없이 세대 차를 느끼고 말지만 그럼에도 책을 덮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대표작들 제목에 모두 ‘이야기’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노년에 대하여』는 역사서인 『문명 이야기』나 철학사상을 소개하는 『철학 이야기』와 달리 개인적인 소회를 풀어낸 에세이다. 워낙에 글 스타일이 활달한 데다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은” 만년에 쓴 글이라 그런지 삶에 대한 생각도 위트도 거침이 없다.(개인적으로는 철학자는 플라톤처럼 운동을 잘해야 한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철학은 일단 의심하고 봐야 한다는 구절에서 혼자 웃었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인간사의 곡절과 문명의 흥망성쇠, 철학과 예술과 종교와 문학이 주는 지혜를 고민하고 전달해 온 노학자답게 균형 잡힌 사색을 보여 준다.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죽음 앞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실로 다양한 물음에 답하는 듀런트의 조언을 읽노라면 아마 나처럼 밑줄 그을 펜을 찾게 될 것이다.

 

민음사 편집부 김윤지

윌 듀런트 | 옮김 김승욱
출간일 2018년 7월 31일
수상/추천 북리스트 외 1건
윌 듀런트 | 옮김 김승욱
출간일 2018년 7월 31일
수상/추천 북리스트 외 2건